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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들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기분

반에서 몇 등 하니? 결혼 언제 하니? 애 언제 낳니?

[정사각형] 04(1).jpg 인스타그램 연재글 @woodumi


친할머니의 기일 때 아주 오랜만에 고모들을 만났다. 아빠의 손위 누이들인 고모님들은 모두 60세에서 80세까지 나이가 지긋하시다. 그녀들에게 나는 늘 못난 조카였었다. 공부도 못하고 증명할만한 특출 난 재능도 없는 그런 조카. 그래서 학창 시절엔 공부 잘하는 자식들을 둔 고모들을 봐야 하는 자리가 불편했다. "듬지는 몇 등이나 하나?" 하는 단골 질문이 너무 싫어서.


성인이 되고는 연락을 하거나 뵐 일이 좀처럼 없는 요즘, 오래간만에 고모들을 뵙겠다고 한건 다 예전의 그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세상에 내 이름으로 된 책이 나왔기 때문에, 이제는 고모들에게 자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연세가 지긋한 고모님들의 눈에는 나의 출간이 그다지 눈부시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만을 오히려 깨닫고야 말았는데.


책을 전해드리자 대번에 "어디 출판사야?"라고 묻는 고모들의 질문. 문학동네나 창비, 민음사 같은 내로라하는 대형 출판사가 아니라면 어르신들을 만족시킬 수 없는 그 현실을 깨닫고야 만 것이다. 세상에는 아주 많은 출판사가 있으며 이제는 대형 출판사가 아니어도 질 좋은 출판을 하는 곳이 가득한 환경이지만, 그런 걸 고모들이 알 턱이 있을까. "듬지는 몇 등이나 하나?"라는 질문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은, 고모님들이 아실만한 수준이 되어야만 납득될 수 있는 그 착잡한 사실이 오랜만에 나를 강타했다.


이것을 또 우리 엄마는 쉴드랍시고, "아... 작은 출판사예요. 아직은 성장하는 단계니까..."라고 대신 변명해준다. 그 변명이 또 나는 서럽고, 한없이 작아만 지는 느낌이다. 여태껏 내 성과가 자랑스러운 나였는데, 왠지 고모들 앞에서는 부끄러워진다. 내 작고 소중하고 예쁜 책이, 별 볼 일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제 책은 작지만 소중해요. (사진출처:핀터레스트)


<보통의 존재>를 쓴 이석원 작가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에세이 분야에서 1등을 했는데, 오랜만에 만난 친척 어르신이 "아이고 나는 석원이가 언제 한번 시원하게 잘됐으면 좋겠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1등을 했는데 더 이상 뭘 어떻게 시원하게 떠야 되는 것인지.


친척을 만나는 일은 왜인지 늘 이처럼 존재를 단단히 입증해야만 하는 그런 일이 된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친척 어르신일수록, 우리는 우리의 성적을 증명하기가 까다로워진다. 당신들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려야만 '잘 되고 유명해진 것'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떠오르는 유망기업보다는 삼성전자에 다니는 것이 잘 된 것이고, 아무리 성공해서 JTBC나 tvN에 나와서 인터뷰를 해도 결국은 친척 어르신이 보는 KBS <아침마당>에 나와야 유명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고모들을 만나고 와서 기분이 좋기는커녕 더 마음이 위축되어있던 어느 날. 내 책을 받아본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듬지야 정말 대단하다. 평생 책 한 권 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넌 정말 너무 멋있어"


정말? 내가? 우리 고모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시던데? 서로 엇갈리는 주위의 평가 속에서 나는 내가 이룬 성적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됐다. 어쩌면, 글쓰기와 출간에 대해 아둔하신 고모님들의 표정만을 내가 필요 이상으로 복기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를 정말 잘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내가 이룬 성과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격려해줄 줄 아는데. 그런 생각을 하니, 꽤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던 고모들의 미적지근한 표정이 조금씩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 난 잘하고 있는 걸. 열심히 글을 써서 책을 냈고, 내 책을 발견하고 출간해준 나의 출판사 역시 누가 뭐라든 내게는 반짝이고 멋진 곳이다'



시간이 지나 고모들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가까운 지인들보다도 사이가 소원한 그분들께는 그저 조카의 안부를 확인할 길이, 몇 평 아파트에 살고 몇 등이나 하는지, 월급은 얼마인지 같은 직관적인 수치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니까. 또 말씀은 그렇게 해놓고 어디 가서 조카가 책 냈다고 자랑하고 계실지도 모르니까. 그분들의 공연한 말과 표정에 너무 상처입지 않는 조카가 되어야지 하고 생각한다.


물-론 다시 친척 청문회가 열리는 날이면 나는 언제고 또 작아질지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 내 객관적인 모습이 친척들의 평가로 달라지는 게 아님을 꼭 명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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