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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절이 나쁜 건가요?

지속적으로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과의 관계, 끝내야 할까요.

[정사각형] 04(1).jpg 인스타그램 연재글 @woodumi


손절. 손절(損切)이라는 말은 원래 경제용어이다. 주식거래에서 도저히 이익이 날 것이라 보이지 않을 때, 현재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주식을 파는 것을 말한다. 앞으로의 더 큰 손해를 막기 위해서다.


어느 날부터 이 손절이라는 말이 인간관계에서도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주식 용어가 일반적인 비유로 쓰일 만큼 나라 경제가 팍팍하고 주식을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인간관계로부터 사람들이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현상의 반영이 아닐까 싶다. 사실 참 서글픈 일이다. 더 이상 어떤 이에게 에너지를 쏟아봐야 내게 돌아올 것도 없고 심지어는 에너지가 고갈되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오를 일 없는 주식을 처분하듯 손절을 생각하게 된다는 거니까.


손절은, 더 이상 그 사람을 내 영역에 두지 않겠다는 단호한 마음가짐을 포함한다. 자연히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과는 달리, 끊어내고자 하는 나의 강력한 의지가 동반되는 것이다. 그래서 왠지 매정하고 나쁜 일처럼 들리기도 한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람들은 손절을 원하면서도 고민하고, 때로는 무르기도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대관절, 그렇게까지 싫은 관계가 왜 생기는 걸까?

손절은 정말 나쁜 걸까? 또 적절한 손절의 시점은 언제일까?



글을 쓰면서 나도 나의 손절 역사들을 쓱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살면서 실로 여러 사람을 손절해왔더랬다. 나의 손절 대상들을 살펴보면, 성격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던 것 같다. 첫째는, 관계는 돈독하지만 내게 심리적 피해를 끼치거나 나를 존중해주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었고, 둘째는 애초에 상대가 내게 무관심하거나 나만 일방적으로 애정을 쏟는 경우였다.


두 번째 경우에는 사실 손절에 특별한 어려움이 따르지 않는다. 나를 찾지 않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지우고 내 마음에서 비우는 일은, 내게는 서운한 일이긴 해도 상대가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반대쪽이 따지거나 아쉬워하질 않으니, 내게도 비교적 에너지 소모가 없는 손절에 해당된다.


문제는 첫 번째의 경우다. 첫 번째의 경우는 손절을 하는데 너무나 큰 심리적 부담이 든다. 일단 손절을 생각하게 되기까지 이미 에너지 소모가 어마어마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좋았던 관계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볼 때까지 해보고, ‘이번엔 다르겠지’ 하며 참아보고, 내 성격의 문제인가 싶어 애꿎게 스스로를 질책해보기도 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손절로 이어진 모두가, 한때는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었다. 5,6년씩 알고 지낸 사람들도 있었고, 너무도 잘 맞아서 평생 친구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끊어내는 게 맞는 것인지를 매번 고민했고, 때론 아쉬움에 다시 손을 내밀기도 했었다. 자책도 많이 했다. 사람이 변하듯 관계도 늙거나 변질된다는 걸 잘 몰랐던 탓이다.



관계의 불편함이 나를 잠식할 때 (사진출처:핀터레스트)


지인 ‘파랑’은, 한때 나와 감성이 비슷해 함께 여러 맛집과 카페들을 다니며 따뜻한 교류를 이어나가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두 해쯤 그렇게 알고 지냈고,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는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단지 딱 하나가 문제였다. 이따금씩 느껴지는 그녀의 모난 말투. “왜 이렇게 달라붙는 옷을 입어요? 누가 보면 술집 여자인 줄 알겠어요”, “그 학벌에 자격증 딴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을 텐데요”, “듬지씨가 얼마나 번다고요, 제가 낼게요” 같은 말들이 그랬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기에 나오는 말들이기는 했다. 남들이 나를 저급하게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비정규직인 나보다 훨씬 많이 버는 자신이 더 많이 내주려는 마음 그 자체가 무엇이 나쁘겠는가.


나는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파랑은 나와 통하는 감수성을 지닌 섬세하고 멋진 사람인데, 함께 있으면 자꾸만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 같으니 말이다. 반박하지 않고 웃어넘긴 그녀의 모난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 어딘가에서 뾰족하게 굴러다니며 나를 찔렀다. 그게 한두 해 깊이 쌓이다 보니 어느 날부터는 자꾸만 그녀와의 만남을 미루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이 관계가 더 유지되어봐야 그녀에게도 미안하고 나에게도 해가 될 뿐이란 걸. 그때 나는 그 카드를 생각한 것이다, 손절.



지인 ‘초록’과의 관계는 또 다른 사연을 지녔다. 초록은 나를 존중하지 않는 부류였다. 착하고 나를 아끼는 사람이었지만, 그게 자신의 방식으로만 이루어진 게 우리 사이의 문제였다. 나는 A를 선택하고 싶은데, 그녀는 자신이 해봤던 B가 더 났다며 내게 강제하곤 했다. 그 마음은 분명 애정이었으리라.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노력했다.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초록의 강제성은 범위가 더욱 넓어져, 단순히 음식을 고르는 일을 벗어나 진로문제, 연애 문제로까지 이어졌다. 나보다 몇 해를 더 살았다는 이유로 뭐든지 자기 식대로 하는 게 옳다며 내게 훈수를 두는 거였다. 결국엔 남아있던 좋은 감정마저 훼손되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여전히 그녀를 좋아했지만 더는 끌려다니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번에도 나는 손절 카드를 꺼내 들었다.


사람들의 손절 이유는 저마다 각양각색이며 천차만별일 것이다. 다 좋은데 약속을 너무 잘 깨서. 다 좋은데 만날 때마다 돈을 너무 안내서. 너무 질투가 많아서. 내 자존감을 매번 깎아내려서 등등. 다양한 결의 사연이 있겠지만 손절의 대상들은 유일하고도 거대한 공통분모를 지닌다. 나를 힘들게 한다는 점.



미안한데, 널 잘라내고 싶어 (사진출처:핀터레스트)


때때로 살다 보면 그런 힘든 관계들이 생긴다. 한때는 내가 애정 했던 사람이었지만, 더는 함께하는 게 불편하고 힘들어지는 관계들. 내가 들인 마음과 정성이 아까워서 아등바등 노력하고 있던 관계들. 그러나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너무 커다란 감정 소모여서 도저히 견딜 수 없겠다 싶을 때, 그때 우리는 손절을 택한다. 다름 아닌 앞으로의 손실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손절을 택한 사람들은 늘 공연한 죄책감을 떠안는 듯 싶다. 본인도 너무 힘이 들어서 그런 거였으면서, 못내 이렇게 물어온다. “내가 성격이 못돼서 그런 걸까?”, “내가 이해심이 부족한 거였을까?” 자신이 받았던 고통은 작게 취급하는 반면, 누군가를 매정하게 끊어냈다는 생각에는 공들여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손절을 결심할 땐, 이미 나의 고통은 극단으로 치달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그 시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손절을 당하는 상대의 입장이 아닌 ‘나’여야 하지 않을까. 이 관계를 유지하느라 상처 나고 찌그러진 나. 이럴 땐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보면 답은 더욱 명확해진다. “계속 만나면 내가 행복한가, 불행한가?” 아마도 불행하다는 쪽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사람에게 미안해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옳을까? 그렇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건, 내 삶의 주체인 ‘나’를 잘 돌보는 것일 텐데 말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때때로 나도 미련이 남아 이런저런 생각해본다. 내가 놓아버린 사람들에 대하여. 내가 조금만 더 힘을 내서 그들과의 관계를 지속했다면, 그 관계는 평온했을까? 그러나 백만 번을 생각해도 고개가 저어진다. 나는 여전히 모난 말투에 상처받아 하루하루 자존감이 깎였을 것이고, 여전히 내게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는 이를 만나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착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나의 평온과 행복이었다. 그래서 손절한 관계들에 한 꼬집의 미련이 들기는 해도, 절대로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가 나쁜 사람이라서 손절하는 게 아니다. 손절당하는 그 사람이 마냥 착한 것도 아니다. 누가 착하고 나쁘고가 아닌, 만날수록 관계가 불균형해지기 때문에 손절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 손절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죄책감보다는 그 당위성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관계가 불편하고, 나를 괴롭히고, 내 일상이 평온하지 않은 것 같을 때. 누구든 손절이라는 카드를 꺼내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살까 말까 하는 고민이 배송을 늦추듯, 끊어낼까 말까 하는 고민은 평온을 늦출 뿐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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