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를 비난했을때, 그것을 양분으로 만드는 방법
하필 그날이었다. 작가 인생 처음으로 출판물 행사에 참석했던, 설레고 기뻤던 날. 그날, 어쩌다 내 책에 대해 안 좋게 쓰인 블로그 리뷰를 읽게 됐다. 아무래도 나는 SNS로 이미 나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 중인 분들의 응원과 사랑 속에 살고 있어서, 내 글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잊고 지냈는지 모른다.
여태 악플이나 쓴소리가 한 번도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사람의 가치관은 정말 다양하고 나 역시도 특정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데, 어찌 세상 모든 사람들의 입맛에 들어맞는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그 차이에서 오는 나와 다른 생각, 다른 의견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만이었고, 또 ‘책’에 대해 안 좋은 리뷰가 달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마저 실은 당연한 일이다. 나의 글 한 꼭지에도 반대 의견이 존재할 수 있는데, 어찌 그 글들이 모인 한 권의 책에 아무런 반감이 없을 수 있을까. 내 책 <어쩌다 백화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어느 블로거분의 글을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분의 리뷰에는 두 가지의 불만이 적혀있었다. 첫째는, ‘백화점 근무’에 대한 어떤 정보적 사실들이 많이 적혀있을 줄 알고 읽었는데 너무 내면 이야기가 많았다는 점. 둘째는, 글쓴이인 내가 지나치게 책과 글쓰기를 신성시해서 불편하다는 점이었다. 근거 없는 욕도 아니고 하나같이 맞는 말이어서 더 마음이 아팠다. 마음이 아프지만 받아들여서 개선해야만 하는 그런 비평이었다.
그러나 나도 인간인지라 머리와는 달리 기분은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기쁜 마음으로 행사장에 왔는데, 그분의 리뷰에 꽂혀 나는 하루 종일 내 쓸모에 대해, 내 글쓰기 방식에 대해, 어떻게 하면 누군가를 불편하지 않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느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면의 내가 말한다.
기분 나쁜 거 알아. 근데 결국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소리야, 알지? 받아들여. 쓴소리가 있어야 성장할 수 있는 거니까. 너와의 친분 때문에 모두가 좋다고 해주는 것보다 이런 반대의 소리도 들어야 하지 않겠어?
그러나 쉽지는 않아서 그날은 어쩔 수 없이 하루 종일 울적한 마음이었다. 그래도 그 리뷰를 곱씹으며 내내 생각하다 보니 저녁 무렵에는 나름의 결과가 도출되었다.
지적받은 첫 번째 사항에 대한 결론은 이러했다. 제목이 주는 직관적인 느낌 <어쩌다 백화점>은 그분뿐만이 아니라 그 누가 보더라도 백화점 업무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적혀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사실, 내 책에는 백화점에서 일어나는 상세한 사건보다는 감정 토로가 주로 적혀있다. 나의 글을 좋아해 주시는 대다수 SNS 독자분들은, 어쩌면 나처럼 정보 습득의 측면보다는 그저 글을 읽는 행위 자체에서 위안을 얻으시는 분들이 많아 아무런 태클을 걸지 않으셨을 테지만, 백화점 업무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내 책을 집어 들었을 외부의 분들에게는 좀 당황스러웠을 것도 같다. 이 여자는 제목을 이렇게 지어놓고 지 생각만 이야기하네? 싶었을지도.
너무 내면 이야기로 파고든 책들은, 소위 나 같은 ‘감정형 독자’들이 선호하는 책일 수밖에 없음을 이 기회로 실감하게 됐다. 앞으로 한 권의 책을 엮을 때는 이 부분을 명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전달을 위한 책인지 아닌지를 보다 명확히 밝힐 것, 제 아무리 내면세계를 보따리 풀 듯 적어놓는 게 내 스타일지라도 제목이나 주제와 연관된 기본적인 정보전달을 잊지 않을 것. 이 두 가지를 말이다.
지적받은 두 번째 사항에 대해서는 사실 맞는 부분과 아닌 부분이 있어 리뷰어의 말씀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다. 맞는 부분은 내가 지나치게 독서와 글쓰기를 신성시하는 사람이라 불편하다는 지점 그 자체였다. 너무나 맞는 부분이라 반박하기가 힘들었고 속으로 아차 싶은 부분이다. 나의 특정 라이프스타일이나 취향을 너무 신성시해서 표현하는 일은 글 쓰는 이로써 분명 지양해야 할 점이니까. ‘나 자신의 것’에 너무 많은 지면을 할애하거나 편든다면, 그렇지 않은 누군가에게 필연적으로 지루함이나 불편함을 줄 수도 있는 일임을 절절히 깨달았다.
하지만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는데, 내가 ‘우월의식’을 가졌다던가 백화점 직원들을 무시한다고 하는 부분이었다. 우월이라니. 그런 말을 쓸 만큼 내가 잘나다고 생각해본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다. 물론 내가 글쓰기와 책을 평균보다 좀 심하게 좋아라 하고 남들에게 설파하고 다니기야 하지만, 그 근거를 우월의식으로 추정하는 것은 그분의 일방적 속단에 가까웠다. 백화점 직원들을 무시한다고 하는 것도 틀린 말이었다. 우선 나 스스로가 백화점 직원이었던 데다, 일을 하면서 좋아했던 직원과 싫어했던 직원이 있었을 뿐 특정 직업군을 무시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내가 뭐라고 그러겠는가.
그러나 동의하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어떤 문장 어떤 단어에서 독자분이 그런 느낌을 받았을지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해보게 된다. 아무리 그게 읽는 사람의 과도한 일반화나 오해라고 할지언정, 어쨌든 그런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내 글에 배려심이 부족했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내 의도와 다르게 읽히지 않으려면, 글의 무게에 대해 고민의 고민을 거듭해야 함을 여실히 느끼는 부분이다.
언제나 냉철하고 사리분별이 정확한 나의 남편은 이번에도 내게 말한다.
“그렇게 일희일비할 거야? 안 좋은 리뷰도 당연히 있는 거지. 좋은 소리만 들으면 발전이 없잖아”
나를 위로하는 친구도 말한다.
“그래도 안 좋은 리뷰라도 있다는 게, 사람들이 네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러다 인스타그램을 켜니, 그곳엔 내가 무슨 주제로 글을 쓰든 내 문체 자체를 좋아해서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었다. 하나의 리뷰에 온종일 스트레스를 받기엔,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느끼며 또 다른 자책감이 든다. 티끌 같은 리뷰라고 해서 무시해서도 안되겠지만, 이 거대한 사랑을 잊어서도 안된다는.
참 어렵다.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슴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이렇게 힘들고 아프다는 게. 결국엔 수련만이 답이겠지. 모든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도, 누군가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 글을 쓰기 위한 것도...,
그날 밤 나는 그 블로거의 포스트에 댓글을 달았다. 내가 이기적이고 모자란 작가였다고, 더 이해심이 넓은 작가가 되겠노라고. 솔직히 씹힐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분은 내 댓글을 읽으셨고 이후 더 놀라운 대댓글을 다셨다. 날카로웠던 리뷰와는 달리 자상한 말씨였다. 자신이 쓴 리뷰에 내가 기분이 상했을까 걱정된다며, 미안하다는 말이 적혀있었다. 그 한마디에, 나는 눈물이 차오른다. 그 누구의 위로보다도 가장 시원하게 속상함이 씻겨 내려갔다. 나도 과민반응을 했던 것이다. 내 책을 비평할 권리가 있는 엄연한 나의 독자에게 말이다.
날렵한 말 뒤에 있는 보드라운 마음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을 읽을 줄 알고, 또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오늘의 내 글보다 내일의 내 글이 낫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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