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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묵시록과 주토피아 사이

너의 엄살이 엄살이 아님을 이해하는데 영겁의 시간이 걸렸다

[정사각형] 01(1).jpg 인스타그램 연재글 @woodumi


고등학교 2학년 세계사 수업시간. 선생님이 역사영화를 틀어주는데 거기서 뱀이 나오자 한 애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이유인즉슨 자기는 뱀을 너무 무서워하는데 영화에 뱀이 나와서랬다. 우는 그 애를 둘러싸고 다른 애들이 토닥여주기 시작할 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쇼하고 있네, 뱀이 화면 밖으로 나오기라도 하나?”


나는 그 애가 총각이었던 세계사 선생님을 좋아해서 관심이나 받아보려고 하는 개수작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선생님이 다가와 우는 그 애의 머리를 쓰다듬긴 했으니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얼마 전 화제의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을 보았을 때, 나는 이야기가 시작도 되기 전 오프닝 장면에서 심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거의 살인 고문에 가까운 장면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 씨, 저렇게까지 잔인할 필요가 있다고?”


불편한 감정을 뒤로하고 드라마를 한참 계속 보아도 생각은 똑같았다. 지옥에서 온 괴생명체들이 인간을 거의 패대기치다시피 할 때, 필요 이상으로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뱀을 보고 동급생 아이가 눈물을 훔쳤던 게 어쩌면 ‘쇼’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던 것도 동시였다.



잔인한 걸 잘 보는 줄 알고 으스댔지. (사진출처:핀터레스트)


나는 잔인한 장면을 잘 보는 편이다. 패싸움을 하든 총에 맞든 칼에 찔리든 제 아무리 높은 수위의 장면도 나는 별 신음하지 않고 잘 본다. 그래서인지 사실 잔인하다는 말이 많이 나왔던 <오징어 게임>을 볼 때도 잔인하다는 생각은 크게 해 본 적 없었다. 총에 맞아 사살되는 장면이 매회 등장하긴 하지만, 전쟁영화와 스릴러물을 즐겨보는 내게 그 정도 장면은 ‘잔인’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을 보았을 때는 달랐던 것이다. 내 마음속에도 ‘수위’라는 게 있었던 게다. 깔끔하게 총 한방으로 사람을 죽이는 <오징어 게임>은 괜찮은 반면, 사람이 산 채로 고통을 느끼는 장면이 고스란히 나오는 <지옥>은 내게 엄청나게 불편했다. 그런 게 있는 줄 몰랐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게도 잔인함에 대한 기준과 취향이 명확히 존재했던 셈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는 전쟁영화처럼 활 맞고 칼 맞고 픽픽 쓰러져 죽는 영화는 잘 보는 반면, <쏘우>나 <호스텔>처럼 사람을 서서히 죽이는 류의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동물을 학대하는 영상은 제 아무리 가짜여도 단 1초도 보지 못하는데 따지고 보면 그것도 잔인함에 대한 내 명확한 기준이었던 것.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전쟁영화라고 추앙받는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보았을 때 쌍욕을 하면서 꺼버린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그 영화에는 살아있는 물소를 두동강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이 CG 없는 실제 장면이란 걸 알았을 때는 더더욱이 그 영화를 저주했었더랬다. 아무리 영화사적으로 훌륭한 작품일지언정, 살아있는 동물을 실제로 해한 그런 영화를 나는 절대로 존경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잔인함에 대한 첨예한 취향 차이는, 굳이 고등학교 2학년 세계사 수업시간까지 거슬러 가지 않아도 찾을 수 있었다. 나의 영원한 TV 시청 메이트 남편. 그는 나와 함께 <지옥>을 시청했건만 그다지 잔인함을 느끼거나 불편해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패대기 쳐지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내가 연신 쌍욕을 내뱉을 때, 남편은 짐짓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냥 재밌으면 돼요”라고. 그런 그와 함께 <지옥>을 보며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잔인함에 대한 면역이 높은 줄 알고 이상한 자부심에 기세 등등했었건만, 이제 보니 나도 딱히 고수는 아니지 않겠는가.


잔인함에 대해서라면 빼놓지 못할 친구가 하나 더 있다. 내 오랜 친구 수정이. 수정이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다치는 장면이 나오면 보지를 못한다. 그런 이유로 그 친구와는 10년이 넘는 세월을 볼꼴 못볼꼴 다보며 지냈으면서도 영화 한번 제대로 보러 간 기억이 없었다. 수정이와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큰 문턱을 넘어야 했다. 맘에 드는 영화가 있어 함께 보러 가자고 하면 수정이가 제일 먼저 물어오는 건, “잔인해?”였으니까. 보통 기준의 잔인함을 묻는 것은 단연코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출연진들 사이에 주먹이 오가거나 피가 나면 안 되는 것이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지만, 수정이의 기준에 잔인하지 않은 게 디즈니 만화영화나 전체관람가 수준이란 걸 처음 알았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제는 알겠다, 서로 다른 '수위'를. (사진출처:핀터레스트)


이제는 알겠다. 내 친구가 단순히 주먹만 오가는 장면에도 쿠션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과, 고등학교 때 한 3초인가 뱀이 나왔다고 울음을 터뜨린 애가 엄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내가 잔인하다며 호들갑을 떨자 남편이 “재밌는데?”라며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얼굴을 보였을 때처럼, 어쩌면 내가 과거 그 애들을 향해 비쳤던 얼굴도 그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지.


그렇게 <지옥> 여섯 편을 보며 백스무 번쯤은 잔인하다며 욕을 내뱉고 나니 문득 생각이 났다. 그간 내가 한 번도 수정이의 성향에 맞추어 <주토피아>나 <코코> 같은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없었다는 것을. 나는 왜 늘 이 영화도 저 영화도 잔인해서 안된다는 수정이에게 “너랑은 영화 못 보겠다야”라며 핀잔만 하기 바빴을까.


수정이에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 마지막 기억은 아마도 <최종병기 활>이 개봉했을 때였던 것 같다. 당시의 대화도 기억난다. 당연하겠지만 이번에도 수정이가 “사람 다치는 거 나와?”라고 물었을 때 나는 “당연하지, 제목이 활이잖아. 활 맞고 죽는 장면이 그럼 안 나오겠냐”라며 코웃음을 쳤었던가. 가까운 친구이면서도 나는 여태껏 잔인함에 대한 그 애의 민감도를 깊이 이해해본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내 친구 수정이는 최고수위가 활에 맞는 장면인 그 영화 <최종병기활>을 지금까지도 보지 못했을 거다. 나는 이제야 아주 조금 이해한다. 너에게는 활 맞는 장면이, 내게 소를 두동강내는 장면과 같았겠구나. 나 역시도, 잠시라도 동물이 아픈 장면이 나올까 봐 SBS<동물농장>은 아예 틀지도 못하는 주제면서, 사람 죽는 건 너보다 잘 본다고 으스댔던 거구나. 이렇게 누군가를 이해하는 데에는 때때로 정말 생뚱맞은 일화가 필요하기도, 이렇게 영겁의 시간이 필요하기도 한 모양이다.


물론 아직도 세계사 수업시간 때의 그 뱀 사건은 진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때 울던 애가 지금은 어디서 뭐하는지 모르기에 “너 정말로 그게 무서워서 그랬던 거야?”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누군가에겐 사람이 다치고 동물이 다치는 장면처럼 뱀이 또 그런 느낌인 걸까? 하고 약간의 이해심을 발휘해볼 뿐이다.

어찌 됐건 우리는 이렇게나 참으로 다 다르다. 그 다름은 색과 결이 너무나도 다양해 영화나 드라마에 담긴 폭력성을 얼만큼 수용할 수 있느냐 따위로도 갈리는 것이다. 청소년관람불가와 전체관람가 사이 어딘가에서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다니. 누군가를 향한 진정한 이해란, 이렇게 터무니없고도 사소한 것에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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