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드 폴은 왜 뮤지션을 하다가 감귤영농인이 되었는가
가수 ‘루시드 폴’에 관한 나의 유일한 기억이라면, 그의 노래도 인터뷰도 아닌 오래전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인 유희열이 했던 말 한마디였다. 오디션 무대를 마친 참가자를 두고 심사위원 양현석이 “클라이막스가 없다”며 스타성을 지적할 때, 유희열이 했던 말.
“왜 꼭 클라이막스가 있어야 돼요? 이런 노래도 있어야 해요. 우리 회사에도 그런 노래를 하는 가수가 있거든요, 루시드 폴이라고...”
한없이 고음을 내지르고 누가누가 호소력이 짙은가로 오디션 경연이 변질되어갈 때, 음악의 다양성, 그러니까 저렇게 잔잔하고 편안한 음악도 있어야 하며 그런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걸 대변하는 유희열의 모습이 너무도 멋있었다. 그런 유희열의 회사에서 일하는 가수라면 와 진짜 멋있을 거야, 하며 나는 루시드 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을 들어보는 것까지로는 이어지지 못한 채로.
그러다가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 온 더 블록>에 그가 인터뷰이(interviewee)로 나왔을 때, 그때 나는 비로소 루시드폴을 진짜로 알게 되었다. 그의 얼굴과 목소리를 그제야 처음으로 보고 들은 것이었다.
그런데 잔잔하고 보드라운 음악을 추구하는 그에게는 놀라운 면모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감히 상상치도 못한 그의 발자취였다.
그는 박사 출신이었다. 버클리나 줄리어드 음대의 박사가 아니다. 로잔 연방 공과대학의 ‘생명공학’ 박사였던 것이다. 생명공하아악?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명문대학의 박사학위로도 모자라 2007년 스위스 화학회에서 고분자과학부문 최우수 논문발표상을 받기까지 한다. 대관절 고분자과학이 뭔지도 모르겠지만 실로 놀라운 행적이었다.
이쯤에서 드는 생각은 “그런데 대체 왜 음악을....”일 것이다. MC 유재석도 같은 질문을 했다. 분명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셨던 것으로 보이는데, 왜 그쪽으로 가지 않고 음악을 하게 된 거냐고. 심지어 안정의 측면으로 보았을 때 음악보다는 이미 박사학위까지 받은 생명공학 분야가 더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거기서 이어지는 루시드 폴의 대답은 이러했다.
“충분히 열심히 했기 때문에 더 하고 싶은 게 남지 않았던 것 같아요”
와. 그럴 수도 있구나. 참으로 신선하면서도 또 수긍이 가는 그의 솔직한 답변에 왠지 모를 쾌감과 희열이 느껴졌다. 박사학위에 최우수 논문으로까지 뽑히는 실력이라면, 대부분 그때부터는 ‘하고 싶음’과는 별개로 그쪽에 뿌리를 내리기 마련일 텐데. 그는 그 분야에서 두각을 얼마나 나타냈는가와 상관없이 ‘더 이상 그것이 하고 싶거나 궁금하지 않아서’ 관두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고민 끝에 음악인으로서의 삶을 택한 루시드 폴의 신선한 행적은 또 이어진다. 그는 별안간 제주도로 내려가 살다가 귤농사를 짓게 된다. 규우우울?
이건 또 무슨 일인지 들어보니 제주와 귤농사도 처음엔 무작정이었다고 했다. 그는 대중적이지 않은 가수였고, 그렇기에 지속 가능한 음악인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고 했다. 그 무렵 제주에 내려가 농사를 지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고.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져 그 이후 일당을 받으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농업기술센터에서 교육을 받는가 하면 후쿠오카의 한 자연농원으로 농사 유학을 다녀오는 열정으로까지 농업인의 삶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처음엔 무작정이었지만 작정한 이후로는 줄곧 진심이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엄연한 농부의 길을 걷고 있는 루시드폴의 수식어는 이제 ‘농부가 된 뮤지션’ 또는 ‘뮤지션 겸 감귤 영농인’이다. 그는 그런 자신을 두고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나를 잘 몰라서, 생명공학과 음악과 귤농사를 하나씩 해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여러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을 두고 누군가는 자신을 팔방미인이라며 추켜세우기도 하지만, 루시드폴은 달랐다. 이 모든 게 내가 누군지 몰라서 일어난 일이라니. 그런데 그 솔직함이 더 우아하게 느껴지는 건 나뿐일까. 박상영 작가의 글을 빌려 표현해보자면, 이런 루시드 폴은 "공작새처럼 잔뜩 몸집을 부풀린 채 살아가지 않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찬찬히 살펴보면, 사실 사람들은 참 하고 싶은 게 많다. “난 하고 싶은 게 정말 없어”라고 하는 사람조차도 일상을 면밀히 살펴보면 분명히 크고 작게 좋아하는 일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생업과 소득으로 연관시켜야 하고, 혹은 주변의 시선이나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의심 때문에 그것들을 삶에서 스윽 밀어내게 되는 게 아닐까.
또는 여러 고민 끝에 하나의 진로를 정해 끝내 그곳에 뿌리내렸음에도, 진정으로 그 일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생명공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지만 말미에는 그 일을 사랑할 수 없었던 루시드 폴처럼, 더 이상 그 분야에 몸담고 싶지 않음에도 이미 멀리 와버렸다는 이유로 그 일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내 마음이 원하는 것. 생명공학을 하다가 음악을 하고, 음악을 하다가 귤 농사를 지어보는 것. 그런 연관성 없는 선택들을 두고 아무도 “그렇게 해도 돼. 이것저것 마음껏 해 봐”라고 말해준 적이 없기 때문일 테다. “한 우물을 파야지, 진로를 택했으면 그 길로 쭉 가야지, 왜 이렇게 끈기가 없어?” 그런 말들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를 잘 모르면서도 아는 척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닐는지.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삶의 방식이 있다. 왜 음악에 꼭 클라이막스가 있어야 되냐고 묻던 유희열의 말처럼, 모두의 삶에 강렬한 지속성이나 연관성 같은 게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을 터다. 인간은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삶을 탐험하도록 태어난 존재니까. 나를 잘 알기 위해 여러 선택들로 생애를 꾸며보는 것도 좋은 삶의 자세라는 걸, 루시드 폴을 통해 나는 배운다.
방송을 보면서 루시드 폴의 인생관에 빠져든 나는 곧바로 루시드폴의 음악을 재생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처음으로 말이다. 잔잔하고 평온한 음악들이다. 곡의 인기를 결정짓는 마력의 도입부와 후반부를 찢는 고음 구간은 없지만, 그래서 물 흐르듯 마음의 안정을 주는 음악. 이런 음악이 멜론 차트 1위를 찍을 리 없다는 것쯤이야 잘 알지만, 반대로 이런 음악이 주는 고요한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세상엔 분명히 많다는 걸 나는 안다.
피로한 날에는 피로하지 않은 음악이 당긴다. 오늘의 나도 그렇다. 그런 음악을 만들어주는 루시드 폴에게 너무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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