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의 유래부터 사례, 경험담까지. 이제 당하지 말자고요!
가스라이팅은 그 교활한 말뜻과 다르게,
우리의 일상에 아주 다양하고 깊게 스며들어있다.
오래된 유명한 영화가 하나 있다. 1944년 작(作) 미국 영화 <가스등(Gaslight)>이라는 영화다. 내용은 이러하다. ‘잭’이라는 남성이 자신의 아내 ‘벨라’를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세뇌하여, 결국엔 아내가 남편의 말만을 맹신하고 의지한다는 이야기.
제목이 ‘가스등’인 데에는 이런 일화가 더 녹아있다. 사실은 남편 잭이 보석을 훔치기 위해 윗집 여성을 살해했는데, 당시에는 건물이 가스등을 나누어 썼기 때문에 잭이 보석을 찾으려 윗집의 등을 켤 때면 아래층의 가스등은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아내 벨라가 “가스등이 어두워진 것 같다”고 하면 잭은 몰아붙인다. 그건 당신의 착각이며 과민반응이라고. 이 오래된 영화가 지금에 와서 자주 회자되는 건, ‘가스라이팅’이라는 심리 용어가 바로 이 영화에서 유래했기 때문일 테다.
상대를 심리적으로 억압하거나 세뇌하여 판단력과 자주성을 잃게 만드는 행위 가스라이팅. 가스라이팅은 그 교활한 말뜻과 다르게, 우리의 일상에 아주 다양하고 깊게 스며들어있다. 꼭 누구나 알아챌만한 짙은 공격성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가족에게서, 연인에게서, 또는 직장상사에게서, 실은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가스라이팅을 당해본 경험이 있을 정도다.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평범해 보이는 이런 말들이
실은 자주성을 야금야금 파괴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나의 오랜 기억을 끄집어내 본다. 당시는 TV에서 <언프리티 랩스타>라는 프로그램이 활발히 방영 중인 때였다. 나는 힙합을 좋아해서 <쇼미 더 머니>도 <언프리티 랩스타>도 모두 즐겨보았다. 그간 주로 남성 래퍼들이 주인공이었던 방송가에서 여성 래퍼들이 출연진으로 나온다니, 대관절 너무 멋지고 신이 나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당시 막 연애를 시작했던 연인은 이렇게 얘기했다.
“어휴 저 날라리들. 저런 걸 왜 보는 거야? 자기도 날라리야?”
순간 멈칫. 무슨 의미로 내뱉은 말인지 몰라 한참을 정적이 흘렀다. 일단 나는 날라리가 아니고, 랩 경연 프로그램을 보는 것은 또 대체 왜 날라리란 말인가. 거기에 참가한 여성 래퍼들은 별안간 왜 또 날라리가 된단 말인가. 화려한 패션 솜씨와 짙은 화장을 보고 그리 말하는 거라면 편견이 너무 짙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 일로 그와는 30분가량을 옥신각신했고, 결국 나는 그 날라리 같은 프로그램을 그가 있는 데에서는 보지 않는 것으로 합의하고 말았다.
허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의 이런 식의 왜곡된 지적은 한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내 옷차람이 야하다고 했다. 혹시 남성들의 시선을 즐기려고 그러는 거냐는 황당한 질문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의 눈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그가 지적하는 여러 가지 행동들을 결국 수정하고 만다. 치마 대신 바지를 입기 시작했고, 남성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사근한 웃음이나 행동을 버리고 무리한 벽을 치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달라붙거나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지 않는 나를 좋아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남자에게 불친절한 나를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좋아하는 옷을 입을 수 없는 불행과, 그를 만족시켰다는 행복 사이에서 자주 혼란스러웠다.
흔히 연애기간 동안 여성들이 많이 겪는 가스라이팅이다. 연인이라는 이유로 무슨 옷을 입었는지 보고할 것을 요구하거나, 다른 이성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거나, 심하게는 아예 연락처를 지우게 하는 것. 남성들과 알고 지내는 것 자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라거나 헤프기 때문이라고 간주하는 것. 나의 많은 여자 친구들이, 남자 친구에 의해 당해보았던 통제다. 그러나 가스라이팅이 정말 무서운 까닭은, 처음엔 “그래, 내 생각은 안 그런데 그가 원하니까 까짓 거 들어주자”로 시작했다가도, 제제나 지적이 누적되다 보면 나중에는 “내가 정말로 그런가?”하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연애 속의 가스라이팅은 성별을 바꾸어서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가스라이팅은 이렇다. 주로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가스라이팅이다. “네가 이러면 엄마가 힘들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나한테 이러니”와 같은 말들이 실은 모두 가스라이팅이라는 걸 알고 있는가. 일상적으로 들어왔던,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평범해 보이는 이런 말들이 실은 자식의 자주성을 야금야금 파괴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주변에서 부모님을 필요 이상으로 인식하고 부모님의 입맛에 맞게 성장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지만 부모님을 위해 의사가 된 사람, 부모님이 원하는 이성과 결혼한 사람, 그런 큰일이 아니어도 매 순간을 부모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언뜻 보기엔 더할 나위 없는 효자 같지만 모두, 부모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해 자주성을 잃어버린 경우에 해당한다.
직장에서는 어떨까. 직장에서 이루어지는 가스라이팅은 맹세컨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이 회사 나가면 어디 갈 데 있을 줄 알아?”, “우리 회사나 되니까 널 뽑아주지”, “회사 내에서 OO씨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들리던데...”, “다른 사람들은 곧 잘하던데 OO씨는 왜 못하지?” 이런 얘기 한 번이라도 안 들어본 사람 있으면 손에 장이라도 지질 자신이 있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던 때, 이 말들을 모두 골고루 번갈아가며 들어보았다. 특히나 ‘회사 내에서 들려오는 OO씨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의 위엄이 얼마나 자존감을 좀 먹는지 잘 알고 있다. 정말이지 평범한 사원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쓸모와 업무능력을 평가절하하게 된다.
그러나 불어오는 바람을 견디는 법은
바람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몸집을 키우는 일일 터.
물론 그렇다고 가스라이팅에 노출된 모든 사람이 자주성을 잃고 망연자실하는 것은 아니다. 가스라이팅의 핵심은 상대의 불안심리를 파고든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생각과 믿음을 흔들어 불안하게 만들고, 결국엔 상대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구조다. 고로, 자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가스라이팅에 세뇌당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반대로 자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사람들은? 주변에서 아무리 가스라이팅을 시전 한들, 기분은 나빠하지만 그에 넘어가지는 않는다. 왜냐면 상대가 틀리고 내가 맞으니까.
언제 누가 어디서 나를 가스라이팅 할지, 미리 예측하거나 피해 가는 방법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불어오는 바람을 견디는 법은 바람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몸집을 키우는 일일 터. 예상치 못하게 나를 가스라이팅 하려는 움직임이 생긴다 해도, 그에 휘둘리지 않을 튼튼한 나로 업그레이드한다면, 그보다 더 강력하고 건강한 대처법은 없을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감사하게도 나는 부모님의 강요에 맞춰 나를 굽힌 적은 없었던, 비교적 편안한 가족관계를 보내온 것 같다. 내 뜻대로 기어이 글 쓰는 삶을 살고 있고, 아무리 똥꼬 발랄한 치마를 입어도 엄마는 늘 예쁘다고 했지 발랑 까졌다고 나무란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가정 밖의 세상에서는 제법 가스라이팅의 경험이 많았더랬다. 나를 맘에 들어하지 않는 여러 남자 친구들에 의해 때로는 스스로를 헤픈 여자, 때로는 결혼에 적합하지 않은 여자로 규명하곤 했으니 말이다. 낙수가 바위를 뚫듯, 오랜 시간을 함께한 연인들이 나를 지적할 때마다 나의 자존감은 터무니없이 깎여내려 갔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상사가 있는 반면, 폭언을 일삼는 상사도 있었다. 그 회사를 벗어나면 나를 받아줄 곳이 아무 곳도 없다고 여겨졌던 시간은, 분명히 가스라이팅에 저며진 시간이었으리라. 그래도 회사가 연애보다는 조금 나았던 점은, 결국 나는 나를 폄하하는 회사들은 한 해를 못 넘기고 시원하게 때려치웠다는 것이다. 연애도 그렇게 생각했더라면 좋았을 걸, 20대의 나는 언제나 좋아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참 열심히도 살았던 것 같다. 내 자주성을 말리면서까지.
항상 기억해야만 한다.
언제나 좋은 사람들은 나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걸
30대가 된 요즘의 내 삶엔, 더 이상의 가스라이팅은 없다. 나를 침범하거나 억압하기는커녕 적당히 무관심해 나를 자유롭게 하는 남편과 살고 있고, 나를 옭아매는 직장도 없고,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손뼉 치는 부모님을 두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남은 긴 일생동안, 또 누가 무적의 논리로 내 자주성을 침범하고 갉아먹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나를 바꿀 생각 따윈 1도 없는 멘탈이 튼튼한 아줌마이기에, 면전에다 이렇게 쏘아붙여주겠다. “야, 내가 싫으면 네가 꺼져”
항상 기억해야만 한다. 언제나 좋은 사람들은 나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걸,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는 걸. 옷을 야하게 입는 내가 싫으면 그가 떠나 청학동으로 가면 될 일이고, 부모님이 못 이룬 꿈은 자식에게 투영시킬 게 아니라 부모님이 직접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 회사나 되니까 나를 받아주는 게 아니라, 그 회사가 받아줄 직원이면 어느 회사든 흔쾌히 받아준다.
영화 <가스라이트> 속 아내 벨라는, 가스등이 어두워지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남편이 아니라고 하면 그리 믿었다. 우리들은 부디, 내 눈으로 보고 내 감정으로 느낀 것들을 타인이 정의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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