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성격을 고치는 게 맞을까? 받아들이는 게 맞을까?
이런 유형들은 살아가기가 너무나 피곤하다
유달리 인간관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말해 뭐하겠는가. 아마도 나는 이 유형에서 가뿐히 상위권을 차지할 것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내면 준우승 정도도 노릴 수 있을지 모른다. 상대의 기분을 너무나 쉽게 알아채고, 내 말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상대의 몸짓에도 너무나 민감하다. 연락이 없으면 왜 연락이 없는지, 내가 뭘 서운하게 했는지, 서운하게 하지는 않을지, 하나부터 열까지 시나리오를 짜서 생각하는가 하면, 상대로부터 조금이라도 부정적 반응을 받게 되면 하루 종일 우울감을 떨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내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다. 정말이다. 타고 태어나길, 사람의 태도와 말에 기민한 센서등처럼 반응하도록 생겨먹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대표주자로서 말하건대, 사실 이런 유형들은 살아가기가 너무나 피곤하다. 좋든 싫든 우리네 인간의 삶은 인간관계와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밖에서 누군가와 끊임없이 소통해야만 한다. 나를 늘 배려심 넘치게 대해주는 사람뿐 아니라 무성의한 사람들, 더 나아가 상종 못할 부류의 인성 파탄자들도 얼마든지 상대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남들보다 특히 더 이런 관계에 예민하다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러나 인간관계로부터 오는 이런 스트레스들을 원천 차단하는 방법은, 모든 관계를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방법밖에는 없을 테니..., 견뎌야만 한다. 예민한 사람들의 일상이 2배는 더 피곤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한때 나는 예민한 성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변의 쿨하다는 사람들을 닮으려고 무진장 애써보기도 했다. 누군가가 나를 싫어해도, 기분 나쁜 언사를 전해도, “그러라 그래”하며 툴툴 털어내 버리는 그들이 너무나 부러웠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는 대표적으로 친정엄마와 남편이 그런 성격이었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지인이 딸의 결혼식에 나타나지도 축하해주지도 않았을 때 친정엄마의 반응은 이러했다. “뭐 내가 실수한 게 있었나 잠시 생각은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뭐. 그건 그 이의 사정이지” 영문도 모르고 끊어진 관계에 대해서 엄마는 미련을 갖지 않았다. 나 같으면 그 사람과 있었던 일을 과거부터 현재까지 다 복기해보면서, 내가 했을 잘못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경사를 축하해주지 않는 상대의 찌질한 심성에 대해 끊임없이 미워하고 분통을 터뜨렸을 텐데..., 엄마는 그렇게 정리될 인연이라면 구태여 속끓일 필요가 없다는 듯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신기하고도 부러웠다.
남편의 경우는 또 다른 결을 지녔다. 그는 애초에 적당한 거리를 두어 누구로부터든 과한 애정적 간섭을 받지 않는 사람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일부러 의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역시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타인과 친해지면 무궁무진한 애정과 관심으로 넘쳐나는 나와는 달리, 그는 타인에 대한 궁금증 자체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와 몇 년씩 알고 지냈다는 지인들의 경우에도 남편과 서로에 대해 면면히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 오빠는 지금 무슨 일 하시는 거야? 원래 어디 사람이래?” 같은 걸 물어봐도 그는 매번 몰랐다.
나로선 너무 충격이었다. 나에게 친하다는 것은 상대의 세계를 흡수하는 것이었으니까. 좋아하는 음식과 영화 같은 가벼운 취향부터, 상대가 만났던 전 연인들이나 인생의 크고 작은 곡절들을 자연스레 공유하게 되면서야 나는 친하다고 느끼는 쪽이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가 하는 얘기. “굳이 꼭 알아야 돼?” 이토록 무심한 인간이 있다니. 그러나 억울하게도, 그는 그런 것치곤 교우관계가 매우 좋은 편이다. 저렇게 살아도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부러웠다.
예민하게 살아가는 게 무척 나쁜 점만은 아니라는 것에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엄마나 남편과 달리, 타인을 좋아하기 시작하면 과몰입하거나 감정적 개입이 심한 편이다. 타인의 슬픔이 내 슬픔이고 타인의 기쁨으로 나도 파티를 마다 않는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헤어지는 것은 더 큰 고통이다. 나에게 멀어진다는 것은 천고의 노력 끝에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손절이었으며, 애초에 적당한 거리의 사람이란 개념도 없었다. 가까우면 찐친이고, 그게 아니라면 실질적으로 남이었다. 이런 관계지향적 성향이 힘겨울 때마다 그래서 엄마와 남편을 닮으려고 노력했었다. 타격받지 않는 그들이 부러워서. 내게 상처 주거나 무심한 이들에 대해 곱씹지 않으려 노력했고, 남편처럼 궁금하지 않은 채로 관계의 틈을 적당히 벌려놓고 살아가려고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말 그대로 노력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애초에 내 옷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위적인 방식으로 부단히 애쓰며 이어간 연애가 결국에 실패하는 것과도 같았다.
하루는 관계가 힘에 부쳐 친정엄마에게 하소연을 하던 어느 날.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에휴 우리 딸, 예민해서 탈이네. 근데, 그러니까 글 쓸 수 있는 거야. 네가 아무것에도 민감해하지 않고 무던한 성격 같았으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내 성격을 원망하고 있던 나는 그 말에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기뻤다. 언제나 내 성격의 ‘개선할 점’만 신경 써서 보았지, 이런 성격으로 빚어지는 ‘좋은 점’들은 눈여겨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래, 나는 예민한 성격 덕에 남들이 포착하지 못하는 걸 포착해서 글을 쓸 수 있는 거지, 예민한 덕에 모든 사람의 입장에 공감하고 영화 속 감정선도 귀신같이 찾아낼 줄 아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니 엄마 말처럼 예민하게 살아가는 게 무척 나쁜 점만은 아니라는 것에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는 만인이 알고 있는 성격유형검사, MBTI를 놓고 따져보아도 그 답은 똑같은 듯 싶다. MBTI로 분류되는 16가지의 성격들 중, ‘가장 좋은’ 성격이나 ‘가장 못난’ 성격 같은 건 없으니까. 16 빛깔의 성격 모두가 제각각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성격을 탓하며 살아간다. “나는 너무 충동적이라 계획 좀 하고 살아야 돼”, “나는 너무 우유부단해서 좀 화끈해질 필요가 있어”, “난 너무 인싸여서 가끔 깊이가 없나 고민이야” 그러나 단점이라고 여기는 그 부분들 모두는 때때로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 된다. 계획에 갇히지 않을 때만 얻을 수 있는 유연한 즐거움들이 있고, 우유부단이라는 말은 신중함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되며, 인싸인 사람만이 주는 커다란 에너지가 가끔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그러니 구태여 장점이 될 수도 있는 성격을 뜯어고치려 노력할 필요는 없는지도 몰랐다. 단점이 장점이 되는 순간을 귀하게 여기면 될 뿐. 그러니 세상에는 예민해서 피곤한 사람들만이 뿜을 수 있는 강점도, 분명히 있는 것일 터.
무언가에 예민하다는 것은 무언가를 잘 느낀다는 것일 테다
타고난 기질은 어차피 노력해야 바뀌지도 않는단 걸 인정한 탓도 있겠지만, 엄마와의 대화 속에서 모종의 깨달음을 얻은 이후, 나는 내 성격을 갈아엎어야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았다. 상대의 기분을 1초 간격으로 느끼는 이 피곤한 성격 덕에 오히려 글을 쓸 수 있음에 요즘은 감사한다. 여전히 시시때때로 관계 스트레스를 받으며 잦은 우울감에 젖는 나이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같은 영화를 보고도 “참 재밌었다” 이상 소감을 말하지 못하는 남편과 달리 나는 열 장은 족히 멋들어진 감상문을 쓸 수 있는데.
그러니 인간관계에 예민한 나머지 자신을 혐오하는 자들이여.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성격은 그 성격에 맞는 각자의 쓰임이 있는 법일 지니. 무언가에 예민하다는 것은 무언가를 잘 느낀다는 것일 테다. 예민함으로 얻은 순간들을 포착해 크고 작은 깨달음들을 얻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한 기쁨이 될 수 있다. 관계에 예민한 사람은 타인의 마음에 민감한 만큼이나 타인의 일에 깊게 공감할 줄 안다. 그림이나 글, 음악 등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 무지개색 감정을 넣을 수도 있다. 또는 뛰어난 상담가가 될 수도 있다. 하다못해 친구나 가족의 사연을 가장 잘 이해하는 따뜻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너무나 예리해서 차라리 무뎌지고 싶었을 그 성격을 이제 장점으로 승화해보자. 그럴 수만 있다면, 매사 피곤하다고만 생각했던 스스로를 이제는 예뻐할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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