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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후보 찍었다고 싸우지 마세요

친구 간에도 가족 간에도, 정치 얘기하지 말라는 진짜 이유



[00표지(1)].jpg 인스타그램 연재글 @woodumi



정치 얘기 그마아안. 이 얘긴 죽을 때까지 안 끝나요.


전 국민의 애간장을 녹이던 아슬아슬한 20대 대선이 끝났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로, 이번 대선은 그 어느 때보다 논쟁적이고 치열했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었으면 좋겠다’를 넘어서 ‘저 후보만큼은 당선되지 않으면 좋겠다’는 열망이 다들 컸기 때문이다. 그만큼 양쪽 후보 모두가 리스크가 컸고, 그로 인한 네거티브도 공방도 상당했다. 어쨌거나 비밀투표이니, 내가 누굴 지지했는지는 쉿. 비밀에 묻겠다.

대선을 앞둔 어느 날, 시댁에 들른 적이 있었다. 온 가족이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이른바 ‘이대남*’인 어린 시동생이 열을 올리며 한 후보를 거세게 비난했다. 진즉에 시동생과 내가 정치성향이 다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동생의 말을 듣고 나니 마음 한켠이 욱신거렸다. 시동생이 싫어하는 그 후보를, 나는 너무나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달려들어 내가 지지하는 후보를 편들거나, 시동생의 의견에 맞서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싸워서 뭐하겠는가. 내가 부대껴 함께해야 할 사람, 사랑해야 할 사람은 저 멀리 TV 속 후보가 아닌 내 시동생인 것을. 더불어 이대남들이 겪는 생활 속 스트레스들이 어떤 것인지도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하는 수 없이 “정치 얘기 그마아안. 이 얘긴 죽을 때까지 안 끝나요”하며 얘기를 일단락 지었다.


* 이대남 : '이십대 남성'의 줄임말로, 2022년 기준으로 1992년생~2002년생이 이에 해당한다. 정치 성향으로는 남녀평등이나 공정 이슈에 관심이 많은 20대 남성을 일컫는다.



대선이 임박해올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5년마다 반복되고 있는 일인데도, 사람들이 대선 시즌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편을 가른다는 거다. 평소에는 잘만 지내던 사람하고도 뉴스를 보다가 갑자기 열띤 논쟁을 펼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긴,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만 해도 나 역시 나와 다른 정치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핏대를 세워가며 싸웠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싸움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에 가까워졌다. 어쩌면 내가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도 옳을 수 있다는 생각, 더 나아가 둘 다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렴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그저 서로가 추구하는 점, 더 우선적으로 여기는 점이 다를 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랬다. 대선의 당락을 결정하는 득표율은 90%도 70%도 아니다. 언제나 비등비등한 숫자, 48% 또는 49% 정도다. 심지어 이번 대선은 고작 0.6% 차이로 승패가 결정된 접전이 아니었던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 대목이다. 나와 다른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이 겨우 10%나 30%가 아닌 무려 절반이라는 점. 절반이 넘는 이 많은 사람들 모두가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일까?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그저 서로가 추구하는 점, 더 우선적으로 여기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니 핏대를 세워가며 싸울 필요란 애초에 없는지도 모른다. 주변인들과 정치적 성향마저 통하면 더 좋겠지만, 뭐 아니어도 그건 존중해야 할 영역의 문제일 테니까.


아닌 게 아니라 가까운 친구들과 나의 정치성향도 모두 다르다. 이번 대선에서도 여지없이 성향은 갈렸다. 예전이라면 그 사실에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겠으나, 이제는 그 사실이 내 관계에 끼치는 영향은 별로 없다. 누구를 지지하건, 그 친구들은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이기 때문에. 같은 후보를 지지하는 것 말곤 아무런 유대관계가 없는 사람들보다 나를 훨씬 더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라면, 싸우지 않고 존중하는 것이 더 마땅한 자세가 아닐는지.


요컨대, 옛말에 이런 말이 있잖은가. “정치 얘기 종교 얘기하는 거 아냐”라는 말. 역시나 옛 어른들 말씀은 틀린 게 없다. 논쟁을 피하기 위한 단순한 회피적 성격의 말이라고 여겼던 그 말은, 이제와 생각해보니 굉장한 배려를 담은 지혜의 말이었던 거다. 괜한 편 가르기가 될 수 있는 민감한 토픽을 꺼내지 않고 상대의 입장을 존중하는 게 관계의 미학이라는 걸, 어른들은 진작 알고 계셨던 모양이다.


세상은 어차피 늘 반반으로 갈린다. 진보정당을 지지하느냐 보수정당을 지지하느냐부터, 신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인싸냐 아싸냐, 계획형이냐 즉흥형이냐 등등 우리를 반으로 가를 수 있는 사항은 세상에 너무나도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와 반대에 선 그들과 싸우고, 나랑 같은 쪽에 선 사람들만을 선택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와 같은 후보를 지지하고, 나처럼 아싸에다 모든 걸 계획하는 사람하고만 친구를 하자면 정말이지 나의 관계망은 금방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고른 사람과 평생 인생친구로 남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살아보니 모든 것이 일치해야 좋은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성향이 달라도 사랑스러운 친구가 있는가 하면, 결이 아무리 같아도 좀처럼 마음이 가지 않는 친구가 있다. 관계란 모름지기 자로 잰 듯 똑 떨어지지 않는, 복잡하고도 다채로운 것일지니.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팽팽하게 양측의 입장이 대변되는 사회


치열했던 이번 대선. 나의 둘도 없는 절친은 나와 다른 후보를 찍었다. 어여뻐하던 시동생도 나와 다른 후보를 찍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설득해 내 후보를 찍으라고도, 그들 또한 나를 설득해 자신의 후보를 찍으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가 세상에 필요로 하는 기대, 더 용인할 수 없는 후보의 리스크가 다를 뿐이라는 걸 알고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맞고 틀리고의 문제라기엔, 그래서 서로 누가 더 맞는지 핏대를 세워가며 싸우기엔, 우리는 서로를 많이 아끼며 지내왔다. 찍먹파와 부먹파가 서로 탕수육을 먹는 방식은 다르지만 얼마든지 함께 중국음식을 시키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어쩌면 종교나 정치성향 같은 문제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문제이지 않을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 깊이,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보듬는 나의 후보를 열렬히 지지한다. 사회적 약자, 동물복지, 기후 문제, 저소득층, 노동자. 이런 것들을 위해 더 많은 말과 행동을 보이는 사람에게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기우니까. 그러나 동시에 늘 인지하려고 한다. 이 또한 지극히 나의 개인적 성향이라는 점을 말이다. 모두가 나처럼 나약하고 스러져가는 것들에만 집중할 수도, 그래서도 안된다는 걸 알기에. 가난한 자의 편을 드는 쪽이 있다면 부자의 편을 드는 쪽도 있어야 할 것이고, 여성에 더 많은 귀를 기울이는 쪽이 있다면, 그로 인해 기울어진 남성의 목소리도 듣는 쪽이 있어야 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팽팽하게 양측의 입장이 대변되는 사회야말로 건강하고 균형 있는 사회임을 나날이 깨달아가는 요즘이다.

그러나 만약, 공중부양을 하고 머리만 짚어도 병을 낫게 한다는 그 후보를 지지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때는 살짝 친구의 정신상태를 걱정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것 말고는 명심하자. 세상은 50대 50이라는 걸. 절반은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우리는 그들 모두와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러니 다들, 누구를 지지하느냐를 문제로 누군가와 불필요하게 얼굴을 붉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빨간색이든 파란색이든 그보다 중요한 건, 대선 결과와 무관하게 서로를 아껴왔던 시간과 마음들일 테니까.






글쓰는 우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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