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같이’ 하는 게 불편할까? 어떻게 극복할까?
난 여럿이서 게임하는 게 그렇게 싫더라?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 그러니까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의 나는 주로 집안에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골목을 누비며, 놀이터의 모래를 만지며, 자전거를 타거나 롤러브레이드를 타며 놀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조용조용하던 아이였기에 어린 내가 자처했던 일인지, 엄마의 양육방식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내 오랜 기억 속의 나는 주로 ‘바깥’이 아닌 ‘집안’에 머물러있었다.
초등학생이 되어서야 동급생들과 운동장을 누비며 놀게 되면서 나는 깨달았다. 나 혼자만 얼음땡과 땅따먹기, 우에시다리(서울말로는 데덴찌)를 모른다는 것을. 나 빼고 모든 아이들은 이런저런 놀이들을 초등학교 입학 전에 다 떼고 온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 왕따는 당하기 싫어 놀이를 대충 아는 척하며 그들 무리에 끼어들었으나, 매번 룰을 몰라 질책을 당하곤 했다. 그래도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열심히 일 년을 습득하며 놀다 보니 그때부터는 큰 장애 없이 섞여서 놀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유년시절의 몸으로 체득한 습관과 취향은 강력한 것인지,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여럿이 함께 하는 문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이어지는 각종 술게임은 물론이고, 2000년대를 크게 강타했던 다양한 보드게임부터, 부루마블, 카드게임, 고스톱에 이어 심지어는 PC에서 만나 함께하는 게임도 나는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아니, 애초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물론 타고난 천성 자체는 사람을 좋아하는 천성이라서, 함께 이야기하고 소통하는 것 자체는 즐기지만, 무언가 무리 지어서 하는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 성격으로 성장한 탓이다.
사회화가 덜 된 어떤 강아지를 보다가
그러던 얼마 전 개통령 강형욱 훈련사가 나오는 <개는 훌륭하다>를 보며 눈길이 가는 강아지 한 마리를 보게 되었다. 신혼부부가 기르는 그 강아지는 자그마한 체구의 흰색 스피츠였는데, 원래 자신의 주인이었던 남성만을 섬기며 다른 이가 다가오면 (심지어 함께 사는 여성 주인에게마저도)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냈다. 제 주인한테는 한없이 온순하면서도 말이다.
강 훈련사에 의하면 그 강아지가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강아지도 사람처럼 자라면서 다양한 사회경험을 해야 하는데, 어린 강아지 시절 그럴 기회를 갖추지 못한 채 성장한 것이었다. 지나가는 이웃, 산책할 때 만나는 친구들, 집에 찾아오는 손님 등과의 다양한 소통의 경험이 부족했기에, 그 강아지에게는 그저 남성 주인만이 자신의 전부이자 우주인 셈이었다. 얼음땡을 할 줄 몰라 어버버 거리던 나의 유년시절이 생각나 괜스레 그 강아지가 안쓰러웠다. 물론 나는 더 늦기 전에 친구들과 소통하려 애를 쓰며 나름의 사회화 과정을 거친 덕에, 그 강아지처럼 이빨을 드러내거나 히키코모리가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물론 사회화는 사회화일 뿐 정해진 기질이 변하기는 무척이나 힘들다는 것에 통감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여전히 여러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임이나 업무가 달갑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나의 기질 자체를 싫어하냐면 또 그것은 아니다. 모름지기 이 둥근 세상에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다양하게 존재해야 한다고 믿으니까. 다만 내가 이렇게 된 데에 어떤 원인이 존재하며, 어떤 부분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한 살 한 살 나이 들수록 타인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나를 이해하는 과정도 필요함을 절실히 느껴가기에.
타협 가능한 적정 지점을 찾자구요
이렇게 저렇게 부딪혀가면서 깨달아가는 것이 있다면, 분명한 건 내가 좋아하는 방식,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것들을 거스르며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타고난 기질만을 고수한 채 영원히 세상과 벽을 쌓는 것도 답은 아닐 터. 문제는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부분은 바꾸되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은 깔끔히 인정하는 적정한 지점을 찾는 것이 아닐까. 그래야 나를 필요 이상으로 미워하지 않으면서 타인과의 소통도 훨씬 수월해질 수 있을 테니까.
이제 인생의 1분기점을 지나 2분기를 살고 있는 나는, 나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규칙을 나름대로 정해보았다.
1. 아무리 노력해도 좋아지지 않는 부분은 좋아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 술게임, PC 게임 등을 비롯한 다양한 함께 놀이 문화
2. 최소한의 사회활동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들은 힘들지만 노력한다 : 업무적인 협업, 단체회식
3. 스트레스받는 활동을 ‘애써’ 하고 난 이후에는 스스로에게 충분한 보상을 준다 : 영화 보기, 혼자 카페 가기 등등 나 혼자만의 시간 갖기
이렇게 나름대로 나만의 규칙을 세워 살아가면서부터는, 행여라도 누군가가 내가 싫어하는 것을 제안할 때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술게임을 안 좋아해. 우리 그냥 이야기할까? 내가 이야기는 잘 들어줄 수 있어”
“나는 다 같이 모여서 하는 것보다는 집에서 따로 해오는 게 편한데 혹시 괜찮으면 그렇게 해도 될까? 대신 내가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할게”
물론 그렇다고 해도 모든 순간이 내 뜻대로 수용되는 것은 아닐 테다. 때로는 다수의 흐름에 맞추어야 하고, 내 것만을 내세우며 남에게 피해를 줄수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예전처럼 진짜 내 모습을 속이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나’로 위장할 때보다는 훨씬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나에 대한 이해가 타인과의 관계에도 도움을 주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나쁜 개는 없듯이, 어쩌면 사람도
이제 나를 잘 아는 지인들은 나에게 여럿이서 협업하는 활동을 하자거나, 술게임 따위를 하자고 권유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런 나를 이해하는 고마운 사람만이 내 곁을 채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제 주인이 아닌 이에게는 한없이 이빨을 드러내며 컹컹 짖던 강아지는, 강 훈련사의 짧은 교육으로 더 이상 타인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지는 않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좁았던 강아지의 우주가 갑자기 팽창하게 될 리는 없겠지. 그저 자신의 우주(주인)만이 전부가 아님을 이해하고, 그 밖에 있는 관계들과 잘 융화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프로그램 말미에 강 훈련사가 강아지를 보며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 강아지 좋은 강아지예요, 잠깐 훈련했는데 이렇게 좋아지잖아요.”
정말이지 세상에 나쁜 개(와 사람)는 없는 지도 모른다. 자신이 왜 그런지 이해하지 못한 개(와 사람)만이 있을 뿐.
고민 많고 마음 여린 어른이들을 위해 따수운 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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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결혼 힐링 에세이 『사연 없음』
현실 직장 생활 에세이 『어쩌다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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