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한남동을 휘젓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잡지사에 다니며 좋은 인터뷰 소스를 구하기 위해 직접 발로 뛰어다녔다. 힙하거나 뜨는 동네가 있다고 하면 그곳을 기웃거리며 '소개할 좋은 식당 없나?' 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녔다.
식당 어디를 가든 처음 방문은 거의 암행처럼 기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다른 손님들과 조용히 음식을 먹고 나왔다. 감사하게도 취재비라는 명목으로 따로 지급해주시는 비용이 있어서 거기서 결제했다. 나중엔 사비로 결제한 경우가 더 많았었지만.
어쨌든 음식, 식당 분위기, 위생청결, 사장님이나 오너셰프님만의 철학 등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까다로운 기준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음식 맛이 괜찮고 식당 외관이나 내부, 셰프님들이 친절하다면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서 다음날 정식으로 취재요청을 드렸다.
한남동 모수는 첫인상부터 남달랐다. 저 때는 한창 한남동에 뜨는 곳이 많았었는데 늦은 저녁까지 '뭐 새로운 곳 없을까?'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매의 눈으로 찾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 두둥실 보름달처럼 눈에 들어오는 한 곳이 있었다.
모수라는 작은 글씨 옆에 단아하지만 어딘지 심오한 꽃그림. 저 꽃이 뭘까?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옆으로 보이는 넓은 오픈 키친. 식당 내부에서 보이는 오픈키친은 많이 봤어도 이렇게 길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까지 자신만의 주방을 오픈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찬 자신감이나 음식에 대한 자부심, 흠잡을 곳이 없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자본력이나 유명세로 저 곳에 둥지를 틀진 않았을거다라는 결론이 나왔다. 난 그 생각만으로 기획안을 올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안성재 셰프님의 서울 입성은 외식업계에 큰 이슈였었다. 겉으로만 봤을 때도 뭔가 대단할 것 같구나!라는 나의 촉이 들어 맞은 것이다. 외식조리과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식품영양전공으로 외식업계에 첫발을 들인 내가 그곳의 역사와 흐름을 얼추 알아가던 것이 이때쯤부터였을거다.
안성재 셰프님이 처음 쓰셨던 칼. (개인소장하고 있는 사진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항상 저 칼을 소장하고 계신다. 인터뷰 내내 부드러운 분위기와 열정적인 스토리로 나에게 많은 에너지를 주신 분이다. 그래서 퇴사 후에도 가장 인상에 남았고 아직도 좋은 기억으로 마음 속에 남아있는 분이다.
개인적인 사담도 나눴는데 아이들 사진을 보여주시면서 자랑을 많이 하셨다.ㅎㅎ 그때는 확실히 표정도 달라지셨고 인터뷰 분위기도 더 편안해진 것 같았다. 가족이 자신의 힘과 에너지의 원천이라며 부모님, 형, 누나와의 추억도 많이 얘기하셨다.
'모수'라는 레스토랑의 이름도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가기 전 한국에서 형, 누나와 뛰어 놀았던 코스모스 꽃밭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한들한들 피어있는 코스모스가 너무 예뻤다며 아련한 표정을 짓던 셰프님의 모습이 아직도 떠오른다.
셰프님의 고향 사랑도 남다르고 인간적인 스토리도 아름다워서 지면에 푸욱 녹여내려 노력해봤는데 '사람' 안성재를 담기엔 지면이 너무 작았다. 그래도 여러 스토리를 써보려 애쓴 느낌은 난다. (기사는 인터넷에 찾아보시면 다 나올겁니다. 아래는 제가 퇴사 후 2년 만에 쓴 개인적인 후기입니다.)
안성재 셰프님의 개인화덕에 대해 나는 불에서 새로운 맛을 창조해내는 '맛의 연금술사' 같다고 표현했다. 불과 연기를 이용한 식재료의 화학적변화를 자유자재로 잘 쓰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흑백요리사'라는 프로그램이 엄청 화제가 되고 있다는 걸 어제 뉴스를 통해 알았다. 제목은 많이 들어봤지만 정작 프로그램은 시청을 안 해봤다. 안대를 가리고 음식을 맛보는 밈이 엄청 유행하고, 심사위원으로 백종원 대표님이 나오고 안성재(?) 셰프님이 나온다는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
그런데 그 '안성재'라는 이름에서 고개를 꺄웃했다.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자료화면으로 지나가는 얼굴이 익숙해서 넷플릭스를 열어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내가 인터뷰했던 그 분이 맞았다. 너무 반가웠다. 좋은 분에 대한 좋은 추억이 새록새록 올라오는 중이다.
시간이 멀리 지나버려서 다른 일들은 꺼내기도 싫고,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안성재 셰프님과의 인터뷰 기억은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