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패션에 중독된 우리들을 위한 생활형 해독제
종로3가역에서 점심 약속이 있었다. 10분 정도 늦는다는 친구의 말에 야외 플리마켓을 천천히 둘러봤다. 요즘 손가락 두세 개에 실반지를 레이어드 해서 끼는 게 유행이던데. 홀린 듯 주얼리 마켓 앞에 섰다. "손님은 피부가 하얘서 은색도 잘 어울리고 로즈골드도 잘 어울리세요!"
가게 오빠는 말 몇 마디로 팔랑귀를 낚았고, "안 어울리면 안 사야지!" 일말의 양심 챙기기 다짐 따위는 내 머릿속의 지우개로 싹 지워버렸고, XX은행 OOO-OOOO-OOOO-OO 김 아무개님에게 쉽고 빠른 토스로 만 팔천 원 송금 완료.
그 두 개의 반지와는 한 달도 안되어 허무한 이별을 했다. 하나는 길에서 반지작 거리다 맨홀 뚜껑으로 골인, 또 하나는 너무 얇아서인지 언제인지도 모르게 토도독하고 끊어져있었다. 만 팔천 원 공중분해 참 쉽죠?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그새 손가락이 허전해진 나는 이번엔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은 가격에 두 개의 실반지를 지하철 지하상가에서 8천 원에 다시 구매했다.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은 가격 이꼬르, 싼 게 비지떡이란 뜻이다. 1초만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다는 건 있으나 없으나 똑같다는 건데 나는 왜 조조영화 한 편이자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이자 1.5일의 지하철 값을 순순히 지불한 것일까? 합리적 쇼핑이란 단어는 중고등학교 국어책에 모순 형용의 예시로 진작 등재됐어야 했다.
다시 산 두 개의 반지 중 하나는 일주일 만에 녹이 슬어 쓰레기통으로 직행했고 결국 이만 육천 원을 소비하고 남은 것은 얇디얇은 은색 실반지 하나였다.
유행은 계절보다 빠르게 바뀌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내 취향은 더 빨리 바뀐다. 어제 산 옷도 오늘 다시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태반인데 하물며 지난주, 지난달, 지난해에 산 옷은 말해 무엇할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행거 정리를 하며 버리고 채우기를 반복한 지 어연 10년 차. 아무리 붓고 또 부어도 여전히 작고 귀여운 적금 통장처럼 아무리 옷을 사고 또 사도 나는 여전히 행거 앞에서 오늘 뭐 입지? 10분을 고민한다.
행거 어딘가에 나만 안 보이는 블랙홀이 있는 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생길 무렵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엉거주춤 대자연의 순리를 따라가 보려는 일개 인간의 본능이렸다.
실반지는 하나의 사례일 뿐, 저렇게 사고 버리고 사고 버리고 한 옷이나 액세서리, 가방 따위를 나열하자면 오늘 밤이 모자랄 거다. 돌고 돌아 다시 오는 유행이라지만 이전의 모습과 똑같이 돌아오진 않는다. 5년 전에 산 숏 패딩과 지금 유행하는 숏 패딩은 엄연히 다르다. 실제로 입는 아우터는 고작 1~2개에 불과하면서도 행거에 걸린 조금씩 다른 수많은 아우터들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짜 문제는 이렇게 산 녀석들이 그 가격만큼이나 애매한 퀄리티라는 거다. 내가 옷을 살 때 자주 체험하는 사고 회로는 아래와 같다. 합리적인 영혼의 목소리는 데시벨이 대체로 마이너스다.
유행이 바뀐다 → 이거 예쁜데? 다들 입고 다니잖아? 나도 사야겠는데? → 근데 이거랑 비슷한 거 있지 않아? → 그렇긴 한데 정말 똑같은 건 아니잖아? 옷은 디테일이 중요하다고 → 지금 있는 걸로는 절대 만족이 안 되겠어? → 응 안 되겠어 꼭 이 스타일이어야만 해 → 근데 내년에도 이거 입을 수 있을까? 유행 변하면 결국 돈 낭비 아냐? → 그건 그런데 지금 너무 갖고 싶은걸 어떡해? → 그럼 너무 비싼 거 말고 싼거 사서 한 철 입고 버릴까? → 솔직히 한 철 용은 너무 싸구려같잖아. 적당한 가격대로 사서 잘만 관리하면 솔직히 2년은 입을 수 있을 거야 → 그래 그럼 그걸로 긁어!
나와 비슷한 사람이 어디엔가는 반드시 존재하기에 인생은 외롭지 않다.
책의 저자 임다혜(풍백)님의 내면을 따라가다 보면 나의 사고 회로를 그대로 박제당한 느낌에 세상 당혹스러우면서도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인생이 즐거운 것 역시 우리가 비합리적이기 때문 아니겠나.
패스트 패션에 중독된 것을 소확행으로 포장하고 있다면, 지하철 지하상가를 쉬이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형 쇼퍼라면, 무심한 듯 시크하게 지나치고 싶어도 자꾸 유행이란 놈이 신경 쓰인다면 30여 년간 모아 온 천 여벌의 옷을 1년 만에 132개로 정리해버린 저자의 삶을 읽어보자.
단순히 옷의 개수를 줄이고 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유행이 아닌 나의 스타일을 찾고, 옷보다는 옷걸이인 나 자신을 가꾸는 데에 더 집중하고, 더 나아가 나의 변화를 대하는 마음 태도까지 정리하는 저자의 1년은 꽤나 웃프면서 유익하다.
"어차피 읽어봤자 나는 안될 거야" 미리 걱정하고 있다면 한번 생각해보자. 모은 옷이 천 여벌에 육박한다는 건 이 사람이 정말 찐이라는 증거고, 옷가게에서 치열하게 옷걸이를 뒤적대는 평범한 여자 중 1명이란 뜻이다.
한 손에 폭 쥐어지는 책을 한 두장 넘기다 보면 나보다 더한 사람이 있었다는 소소한 위안과 함께 건강한 쇼핑 라이프를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 테니 티 한 장 값도 안되는 이 책의 구매를 망설이지 말자. 당신은 알고 있다. 고민은 배송만 늦출뿐이란걸!
패션은 '어떤 삶을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때그때 싸다고 생각 없이 사버리는 인생이었나 보다.
제일 억울한 건 좀 싸게 사겠다고 그동안 내 시간을 날린 것이다. 천 원 싸게 샀다고 좋아했지만 그러느라 날린 내 시간이 천 원어치는 넘지 않나?
'하나를 사도 제대로 된 걸 사자!'라고 항상 다짐한다. 그리고 쇼핑을 할 때도 '이거야말로 제대로 된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산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이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 쇼핑을 나서게 된다. 이런 흐름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나는 옷을 산 게 아니라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설렘'을 샀던 것 같다.
특히 '당신은 정가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구절이 마음에 들었다. 세일이니까, 싸니까 옷을 사는 건 술 먹고 남자를 만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가격에 현혹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세일가가 아니라 정가였어도 살 만한 옷을 사라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적은 물건으로 생활하고자 할 때 특히 중요한 것은 매일 사용하는 물건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반드시 비싼 물건이나 고급품을 사용할 필요는 없지만, 정말로 마음에 드는 물건, 혹은 사용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물건만을 고르도록 하자.
이즈미 마사토의 <부자의 그릇>이라는 책을 보면 사업이 망해 망연자실한 시간을 보내던 주인공이 나온다.
추운 날, 돈을 탈탈 털어 따뜻한 차 한 잔을 사려는데 100엔이 모자라자 한 노인에게 돈을 빌린다. 그러자 노인은 "흠, 돈이라는 건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만약 한 푼도 없었다면 자네는 밀크티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나? 포기하고 얼른 집에 가서 주전자에 물을 끓여 뜨거운 물이나 마시고 있겠지. 동전 몇 푼을 가지고 있다 보니 자네는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어. 사람들은 돈이 있으면 무조건 쓰고 싶어지는 모양이야"라는 말을 한다.
그동안 옷에 투자하느라 몸에는 너무 무심했다. 옷은 몸을 돋보이게 거들 뿐인데 나는 거꾸로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문제는 옷이 아니라 내 몸이었는데 말이다.
세상에는 옷이 참 많다. 요즘엔 예쁜 게 싸기까지 하다. 하지만 모든 옷을 다 입을 순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옷을 고를까? 그건 바로 '나의 내면의 소리'라는 결론을 얻었다.
예전에는 이것도 예쁘니까, 집에 있는 옷들 옆으로 걸기만 하면 되니까, 용돈 예산 범위 내니까 사자!하고 쉽게 옷을 샀었다. 하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 '이거 없으면 안 돼!'라는 마음일 때 옷을 산다는 감각을 알게 되었다.
비우면 기분이 좋다. 그걸 알게 된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가장 큰 수확이다. 비운다는 건 남길 것을 고른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고민할 시간을 갖게 된다.
못하는 일이 있어도 되는 것 아닌가?
사람에게는 못하는 일과 하고 싶지 않은 일,
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일. 그것도 역시, 그 사람을 만드는 거죠.
잘하는 일만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에요.
- 마스다 미리, <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