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 소재가 고갈돼가던 5월의 어느날 우리는 동물원에 갔다. 전 남자 친구는 동물원을 좋아했다. 왜냐고 물으니 동물의 생기 넘치는 기운이 좋다고, 어떤 동물이 제일 좋냐고 물으니 호랑이라고 했다.
몇 년 만에 동물원이야, 맨 꼭대기에 있는 호랑이를 먼저 본 뒤 천천히 걸어 내려오기로 했다. 케이블카 위에서 두 다리를 흔들대며 내려다본 동물원은 꽤 황량했다. 몇 군데는 수리 중 간판이 붙어있었고 이유 없이 비어있는 곳도 보였다. 시시한 조감도에 나는 금세 흥미를 잃었다.
자, 이제 오빠가 좋아하는 호랑이 기운을 충전해보자! 동물원 입장부터 사진기사 노릇을 하며 일찌감치 지쳐있던 그를 호랑이 앞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안 호랑이는 충전 게이지의 마지막 한 칸을 깜빡거리는 보조배터리처럼 누군가에게 자신의 기운을 나눠주기엔 자신의 덩치를 감당할 기운마저 부족해 보였다. 이거 차라리 콘푸로스트를 먹는 게 낫겠는데?
급한 대로 수혈한 포카리스웨트 500ml 한 병을 원샷하고 나서야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동물원 대신 자취방구에서 콘푸로스트나 말아먹는 게 더 즐거운 데이트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호랑이와 작별 인사를 했다. 어른이 되어 찾은 동물원은 그렇게 시리얼 한 그릇보다도 못한 인상을 남겼다.
출처: 네이버 영화
동물원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해치지않아>엔 동물이 없다. 재정위기에 빠져 돈이 되는 동물들을 죄다 처분당했기 때문이다. 로펌 정직원 자리를 걸고 동산 파크 관리 임무를 부여받은 새 동물원장 태수는 사람들이 동물원에 갖는 기대이자 환상, 동물원엔 동물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역이용해 직원들이 직접 살아있는 동물을 연기하는 엉뚱한 자구책을 세운다.
사족보행으로 비교적 따라 하기 쉬운 나무늘보, 사자, 북극곰, 고릴라가 된 태수와 직원들. 처음엔 어설펐던 동작들이 어느새 능숙함을 넘어 북극곰이 콜라를 원샷하는, 모두가 다 아는 그 CF를 재현하는 경지에 이른다. 현실 속 동물원의 모습과 멀어질수록 사람들은 열광한다. 사실 그랬다. 우리 안의 무기력한 현실보다는 KBS1 동물의 왕국에나 나올 법한 야생미 넘치는 모습이 사람들의 동물원에 바라는 진짜 기대였다.
하지만 내가 2년 전 동물원에서 마주한 현실은 동물 탈을 처음 쓴 직원들의 모습과 더욱 닮아있었다. 좁은 공간이 갑갑해서 미쳐버릴 것 같은, 하루 종일 같은 자세가 지겨워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 밖에서 날아오는 페트병을 피할 기력조차 없이 무기력한, 그 모습.
수의사 소원이 쓴 사자탈이 클로즈업된 순간, 탈에 박힌 인공 눈과 동물원에서 본 사자의 초점 잃은 눈이 겹쳐졌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이 영화를 보다가 나는 다시는 동물원에 가고 싶지 않아졌다. 동물원 영화를 보다가 동물원에 가지 않기로 결심하다니.
출처: 네이버 영화
어쩌다 마주치는 우연한 계기는 영화에서도 여러 번 등장한다. 태수는 첫 회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호랑이 모형을 빼돌리던 전 직원과 우연히 마주친 순간 동물 탈을 구상하게 됐고, 북극곰 까만코와의 강렬한 첫 만남이 소원을 수의사의 길로 이끌었으며, 친구랍시고 오지랖 떨며 태수 속을 박박 긁던 대학 동기 녀석이 로펌 사장 소유의 페이퍼 컴퍼니가 꾸민 땅 놀음에 동물원이 동원됐다는 사실을 알려준 뜻밖의 정보원이 돼준 덕에 태수는 동물원을 구할 수 있었다.
동물, 노동, 시장 논리와 같이 글자만으로도 무게가 꽤 나가는 주제를 우연을 가장한 일상적 차원으로 소화하는 영화의 연출에 대해 평은 두 가지로 갈린다. 제목처럼 모두를 해치지 않고 지나치게 착한 탓에 심심하고 어설프거나, 혹은 그런 덕에 부담스럽지 않고 따뜻하거나.
출처: 네이버 영화
일상이란게 별거 아닌 것 같아보여도 사람 마음을 툭툭 건드리는 재주가 있다. 뉴스 목록에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동물 관련 뉴스를 볼 땐 아무 감흥이 없다가, 아프다 말도 못 하고 며칠을 끙끙거리다 긴급 수술을 받고 복대를 찬 이모네 강아지를 품에 안을 때에야 동물도 사람처럼 아프구나 돌이켜보는 나는 후자의 의견에 한 표를 던진다.
눈 앞에 마주한 일상의 힘을 아는 사람으로서, 거대 담론을 뿌리 삼아 현실에 드리워진 찰나의 순간들을 모두가 더 많이 마주치기를 바란다. 영화관 좌석을 채운 커플 중 한 사람이라도 다음 데이트 장소로 동물원을 고민하다 우리 안에 갇힌 동물들을 떠올리게 된다면 이 영화는 제 몫을 해낸 게 아닐까.
영화를 같이 본 회사 친구는 영화가 끝나고서야 한 번도 동물원에 가본 적이 없음을 고백했다.
아, 제주도엔 동물원이 없구나.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뭐에요? 코끼리라고 자답한 그는 코끼리는 가장 힘이 센데도 먼저 시비를 걸지 않는게 좋다고 했다. 딱히 좋아하는 동물은 없는데. 문득 가장 센 동물은 하마라고 주워들은 기억이 떠올라 화제를 돌렸다. 코끼리냐 하마냐 아옹다옹하면서 석촌호수를 걸었다. 그에게 동물원에 가서 코끼리를 봐보라고 해야 하나, 앞으로도 쭉 가지 말라고 해야 하나, 고민했다.
결국 호수를 빠져나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언젠가 마주칠 사소한 순간이 빠른 시일 내에 다가오길 열심히 바라 주기로 했다. 어쩌다 마주친 무엇에 그의 마음이 꼭 사로잡힐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