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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맛탄산수 Dec 23. 2019

구글 맵으로 쓰는 사진 일기 (Dia0 ~ Dia2)

환대, 비행, 흥



"오늘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오늘은"으로 시작하는 일기가 가장 나쁜 거라고 하셨다. 일기라는 건 오늘은,으로 시작해서 먹고 놀고 싸고 자는 하루 일과를 구구절절 나열하는 게 아니라 가장 인상 깊었던 일 하나만 써도 충분한 것이라고.


    그럼에도 나는 꿋꿋하게 "오늘은"으로 일기를 시작하곤 했다. 일상의 이 경험 저 경험에 '첫'이란 접두사가 붙는 게 디폴트 값인 초등학생에게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어제는 그저께와 다르다. 초등학교 2학년에게 단 한 번뿐인 오늘을 오늘로서 강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오늘은"으로 일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떤 경험에 '첫'이라는 접두사가 붙는 게 설렘보단 부끄러움 혹은 민망함으로 다가오는 나이, 스물여덟. "오늘은"이란 단어가 아까울 정도로 단조로운 스물여덟의 일상은 오늘을 어제로, 그저께로, 그끄저께로 바꿔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림 위에 기름종이를 올려놓고 스케치를 따듯이 한 땀 한 땀 똑같은 루틴을 소화하는 데에 집중하고, 어느 한 구석 어긋남이 없음에 괜스레 안도하는 안전하고도 권태로운 일상.


     매일이 새로운 여행지에서 "오늘은"이란 단어를 다시 꺼내 본다. "오늘은" 뭐 하지, 뭐 먹지, 뭐 보지. 아침 메뉴부터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의 번호까지 오늘을 어제와 구분 지어 기록하고 추억할 단서가 이렇게도 넘쳐나는데 몸과 머리의 용량에 한계가 있는 게 아쉽기만 한 여행지에서의 오늘들. 구글 맵의 타임라인 기능으로 만든 오늘들의 스냅샷을 손가락으로 스윽 따라가다 보면 나는 언제든지 그 특별했던 오늘로 돌아갈 수 있다.






포르투갈에서의 11박, 기억의 단서들



Dia 0. 환대                  


 날의 사람

대학 친구 J

그 날의 장소

캐리어가 사람 하나 공간을 차지하는게 괜시리 민망했던 퇴근길 9호선 급행 열차 안.

 날의 

가양 구로 이사 간 J가 흔쾌히 여행 베이스캠프를 자처해준 덕분에 오후 반차를 내고 일찌감치 캐리어를 꾸렸다. 오전 비행기라 새벽에 일어나야 했는데, 일찌감치 매트리스 위에 나란히 누워놓고는 "이제 진짜 자자", "아니 근데 있잖아"를 수차례 반복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직장인이 되면 다들 이렇게 대화가 고파지나 보다.

그 날의 무엇

J가 차려준 저녁상에 올라온 얼린 청포도. 아삭한 소리를 내며 베어 물면 정수리까지 한기가 차오르지만 이치한을 몸소 실천하게 하는 중독적인 맛. 청포도는 차가웠지만 J의 환대는 따뜻했다.  



Dia 1. 비행


그 날의 사람

12시간 비행 내내 충전 케이블을 빌려준 옆좌석 외국인

그 날의 장소

리스본 입국장. 리스본 공항에서 우버를 타려면 출국장이 아닌 입국장으로 가야하는 사실을 몰랐던 외국인의 유로 첫 지출은 우버 취소 수수료였다.

그 날의 일

충전 케이블이 짧아 핸드폰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나에게 옆좌석 외국인이 C타입 케이블을 쓱 건넸다. "ㄸ.. 땡큐." 더 격하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짧은 영어엔 짧은 감정밖에 담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이번 여행은 유난히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갈 많이 받았는데, 시작이 반이라고, 절반은 그의 덕분인 듯하다.  

그 날의 무엇

장거리 비행의 부담을 한껏 덜어준 고마운 삼총사 - 마스크팩, 운동복, 슬리퍼. 침대에서 바로 나온 듯한, 아니 침대로 바로 골인해도 이상하지 않은 몰골이었지만 이젠 남의 눈보다 내 몸이 편한 게 좋은 나이가 되어버린걸.



Dia 2. 흥  

[리스본 1일차]
아줄레주 박물관 ▶ 쏠 전망대 ▶ Canto da vila ▶ 그라사 전망대 ▶ 벨칸토


그 날의 사람

얼결에 포르투까지 여행 메이트가 된 C언니, 6D로는 잘 찍으면서 스마트폰으론 못 찍는 K오빠.

그 날의 장소

Canto da vila 레스토랑. 사장님 텐션에 쏠 전망대에서 꽁꽁 얼어온 몸이 사르르 무장해제됐다. 음식, 와인, 분위기 삼박자를 고루 갖춘 집. 두 번을 못 간게 아쉽다.

그 날의 일

소매치기와 강도, 분실 사고까지 모든 것에 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내 지갑을 털어간 건 여행을 개시한 첫날의 "흥"이었다. "첫날이니까"라는 이상한 주문에 걸린 나는 C언니가 추진한 미슐랭 투스타 탐방에 겁도 없이 조인해 이번 여행에서 가장 비싼 2시간을 보냈다.

그 날의 무엇

누가 저런 걸 써, 의 "누가"를 아무리 피하려 해도 결국은 굴복해야 할 최후의 순간이 온다. 앱등이에겐 에어팟이 나에겐 셀카봉이 그랬다. 혼자 여행할 거면 가제트 팔이라도 있어야지 싶어 구매를 하긴 했는데 그라사 전망대에서 인생 셀카 몇 장 건지고 나니 어글리 코리안이 대수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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