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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맛탄산수 Dec 24. 2020

돈보다 시간이 많아졌다

퇴사 후 첫 일주일 

시간이 금이야, 시간 있을 때 마통 뚫어서라도 많이 놀아. 아직 취업 전인 후배들에게 조언하곤 했다. 그게 내 일이 되기를 진심 반 농담 반 바랐던 순간을 지나 진짜 현실이 된 지금. 마음만은 한껏 뽀로로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얼마 없는 인류애를 끌어모아 집콕으로 연명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직 퇴사가 실감 나지 않는다. 재택 중에 땡땡이치는 것 같기도 하고, 남은 연차를 털어내는 긴긴 겨울 휴가 중인 것 같기도 하고, 월화수목금토일이 아니라 토일토일토일토인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여덟 시에 눈이 번쩍 떠지고, 있는 할 일 없는 할 일 글어모아 목록을 만들어 시간을 채우고, 침대보단 노트북 앞 의자가 마음이 편하다. 시간을 줘도 재밌게 노는 법을 까먹은걸 보니 직장 4년 헛다닌게 아니군!


롱 타임 어고 대학생일 때는 무엇이든 별생각 없이 푹 즐기곤 했는데, 이제는 하나를 해도 이걸 어떻게 요렇게 저렇게 해서 이렇게 해볼까?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문다. 이 생각 자체는 생산적일지언정 생각의 무게에 짓눌려 행동이 굼떠진 건 함정. 퇴사 일기 매일매일 써야지 그림도 그리고 직장인들 마음을 뒤흔들 기갈난 드립도 쳐야지 하다가 고작 노트북 앞에 앉는 데에 한 세월이 걸렸다. 아무래도 이건 병인 듯.


의식의 흐름으로 정리해본 퇴사 하니 좋은 점.


퇴사하니 좋은 점 1. 당근을 아무 때나 할 수 있다. 언제 가능하세요? 오늘 아무 때나요.

퇴사하니 좋은 점 2. 밤에 걱정 없이 맥주를 마실 수 있다. 혼자 마시는 맥주는 재미없긴 해도.

퇴사하니 좋은 점 3. 집이 깨끗해진다. 할 게 없어서 청소를 하고 또 하고 또 함.

퇴사하니 좋은 점 4. 책을 읽는다. 회사 다닐 땐 넷플릭스 보고 유튜브까진 볼 시간이 없었는데 이제 넷플릭스 보고 유튜브 보고 펀탭 보고 카톡 좀 하고 웹서핑하다 넷플릭스 다시 보고도 시간이 남아 책을 편다.

퇴사하니 좋은 점 5. 틈새시간 공략이 가능하다. 병원, 미용실, 마트를 덜 붐빌 때 갈 수 있다.

퇴사하니 좋은 점 6. 불필요한 식욕이 없어진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먹지 않는다.

퇴사하니 좋은 점 7. 대충 맛없는 걸 욱여넣어도 맛있다. 식비 절약 가능.

퇴사하니 좋은 점 8. 사람이 너그러워진다. 인류애 급상승.

퇴사하니 좋은 점 9. 눈이 8시에 떠져도 정신 안차려도 된다. 

퇴사하니 좋은 점 10. 놀자, 만나자, 밥먹자는 인사를 진짜 실천하게 된다.

퇴사하니 좋은 점 11. 별거 아닌 일로 엄마한테 카톡을 한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주변을 돌본다.

퇴사하니 좋은 점 12.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와 도전정신이 샘솟는다. (남아있는 월급의 영향?)

퇴사하니 좋은 점 13. 좋아하는 가수의 새 앨범을 한음 한음 집중해서 들을 수 있다.

퇴사하니 좋은 점 14. 커피를 음미해서 마신다. 살기 위해 마시지 않는다.

퇴사하니 좋은 점 15. 청소하며 발견한 유물을 당근해 소소한 부수입을 올릴 수 있다. 

퇴사하니 좋은 점 16. 밥 먹으면서 넷플릭스 보는데 메신저 연락 와서 흐름 깨질 일이 없다.

퇴사하니 좋은 점 17. 이거 저거 할거 다해도 겨우 3시다.

퇴사하니 좋은 점 18. 저녁뿐만 아니라 아침과 점심도 있는 삶.

퇴사하니 좋은 점 19. 오후의 밝은 해를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다. 

퇴사하니 좋은 점 20. 이런 쓸모없는 걸 하며 잔잔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한 줄 요약: 별거 아닌 걸 별거 아니게 할 수 있는 게 퇴사의 진짜 좋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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