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30일차 (17.09.21)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공짜표로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를 봤다. 내 돈 주고 영화관에서 볼 영화는 아니지만 시간+지역을 고려했을 때 최선의 선택이었음.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벤 스틸러가 주연이라고 해서 큰 걱정없이 영화관에 들어섰다. 셔틀에서 좀 잤어야 했는데... 오늘따라 차가 막혀서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마음 졸이느라 하나도 못 잤다. 결국 영화 초반부는 좀 놓쳤다.
이 영화는 열등감 혹은 현타에 대한 이야기다. 40세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소위 '불혹'의 나이라고 하지만, 47세의 브래드는 어째 나보다 더 주변 사람들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친구들의 성공에 소외감을 느끼고, 직원의 퇴사에 자신이 몸 바쳐 일군 회사를 무쓸모하다 여기고, 파릇한 20대 여대생의 총기 어린 눈빛과 누구보다 씩씩한 자신의 아내를 비교하고, 재능있는 아들이 세상에 인정받고 나면 자신을 하찮게 여길까 고민한다. 아, 이렇게 쓰기만 해도 피곤해.. 브래드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한다. 얜 나보다 잘났으니 이렇겠지, 쟨 나보다 못나도 이건 잘하던데, 쟤 앞엔 얼마나 장밋빛 미래가 놓여있을까, 왜 내 앞은 이렇게 진흙탕 뿐인걸까.
브래드가 정말 쓰레기같은 인생을 살고있냐, 하면 그건 또 댓츠 노노다. 정치경제를 전공한 뒤에 기부자와 기부처를 잇는 비영리단체를 운영하고 있고(물론 직원의 퇴사로 1인 기업이 되버림), 예쁜 아내와 음악적 재능이 있는 아들이 있고(물론 아내와의 사이는 좋지만 성생활은 거의 없다시피하며 아들은 착하지만 살짝 무뚝뚝함), 주위에 성공한 친구들도 많고(물론 그에게 엄청난 열등감을 주었음), 아들의 대학 입학 인터뷰를 위해 같이 동행할 돈과 시간도 있다(물론 비즈니스 석을 타기엔 살짝 돈이 부족함).
이런 '물론'이 계속해서 그에게 현타를 가져온다. 특히 돈 앞에 장사없다고, 이놈의 자본주의가 브래드를 자꾸만 흔든다. 오랜만에 나간 모임에서 어마어마하게 성공한 친구들과 달리 난 그저 쭈구리일 뿐이고, 직원은 차라리 자기가 돈을 많이 벌어서 기부하는게 낫겠다며 퇴사를 고하고, 유명해진 친구는 비영리단체의 이사회에 참여해달라는 메일을 씹은 채 티비 속 토크쇼에서 실실 웃고 있고, 아- 나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노력했는데 왜 정작 내 세상은 아름답지 않을까. 같은 출발선에 서있는 줄 알았던 녀석들은 언제 이렇게 커버린걸까. 브래드는 자존심에 난 상처에 합리화라는 연고를 바른다. 그래, 역시 돈명예권력 삼대장이 최고였던 것이다. 난 잘못 살아도 한참 잘못 살았어.
아저씨라면 지금 20대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건가요? 파릇한 20대 여대생이 브래드에게 묻는다.
"일단 어떻게든 돈을 많이 벌라고 하겠어. 다른 문제는 그 다음에 생각하라고. 세상은 경쟁이고, 절대 아름답지 않아."
"아저씨, 저는 아저씨 괜찮게 사는 것 같은데요? 제가 사는 인도에선 하루에 2달러만 있어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저씨는 도대체 왜 경쟁하는거에요?"
세상에 아픔 없고 슬픔 없고 시련 없는 순도 100% 행복한 삶이 어디 있을까. SNS와 TV, 신문에서 항상 웃고 있는 브래드의 친구들도 사실 인생의 한 부분은 엉진망창이다. 유명 인사로 떠오른 친구는 자기 자랑밖에 몰라 제자에게 혹평받는 교수였고, 어마어마한 전용기를 갖고 있던 친구는 사업 실패로 전용기를 압류당하고 심지어 딸이 큰 수술을 앞두고 있었으며, 먼나라 외딴 섬에서 하루종일 미녀들과 뒹굴거릴줄 알았던 친구는 사실 미녀보단 술에 빠져있었다.
브래드가 집도 없고 절도 없고 가족도 없고 돈도 없는, 그런 빈곤한 인생이었다면 오히려 이 열등감이 그에게 어떤 추진력으로 승화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브래드는 안다. 자기 삶이 객관적으로 완전 바닥은 아니거든. 잘나가는 친구들은 아직 나의 전화를 반갑게 맞아주고, 저녁 식사도 할 수 있으며, 내 아들을 위해 인터뷰를 주선해주기도 한다. 내 아내와 나는 아들을 잘 길렀고, 아들은 재능있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실력 있는 인재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비영리단체 사업은 아직 누군가에게 꽤 멋지고 괜찮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다만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은 잘나가는 이들만이 특권일 수 없음을, 이 땅에 발딛고 서있는 누구에게나 보장된 기본권과도 같은 가치임을 그는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긍정은 절대 순응 혹은 멈춤이 아닌데.
친구와의 저녁 식사에서 다른 친구들의 불행을 접한 브래드는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일종의 자기 방어기제였을까. 곧장 아들의 친구들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연주회로 향한다.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그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손에 주어진 악기에 몸을 맡기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 바이올린이 플룻보다 소리가 더 크다고, 첼로가 비올라보다 소리가 더 낮다고 연주가 좋아지는게 아니다. 각자 자신의 몫을 묵묵히 다할 때, 가장 아름다운 연주가 된다. 연주자에게 최고의 행복은 그게 아닐까. 그 이치를 눈 앞에서 목도한 브래드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모르는게 약이라는데, 스마트폰이고 TV고 인터넷이고 라디오고 전부 행복하고 신나고 들떠있다. 행복을 목격하는건 참 쉬워졌는데, 행복을 경험하는건 아직도 어렵다. 눈은 저 멀리 허공을 보는데, 발은 땅을 딛고 있는게 우리네 현실이다. 그래서 내 삶을 긍정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게 점점 어려워진다. 나빼고 다 집 있고, 나빼고 다 고양이 있고, 나빼고 다 행복한 것 같거든. 사실 까보면 다 똑같은데. 맨날맨날 행복하자는건 아닌데, 행복할 때 진짜로 행복을 느끼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이런 하수상한 시대에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