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에게 꼭 필요한 드라마가 청불이라니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밥상 앞이 왠지 조용해 넷플릭스를 튼다. 대중없는 취향을 가진 나에게 넷플릭스의 추천(이라 쓰고 홍보라 읽는) 콘텐츠 목록은 알면서 속아주는 귀여운 변명같은 것.
며칠 째 목록에 떠있던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1화를 재생한다. 그러고 나면 눈 깜빡할 새 창 밖의 해가 져있는 기묘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나같은 사람이 벌써 4천만명이고, 시즌2의 제작이 진행중이란다. 오랜만에 여기저기 추천하고픈 드라마가 생겼다.
내용은 간단하면서 흥미롭다. 성 상담사인 어머니와 사는 오티스(사진의 오른쪽 인물)가 고등학교에서 다양한 친구들의 성 고민을 상담해주는 동시에 본인의 성고민을 해결해나가는 하이틴 성장 드라마다.
매 화의 첫 장면을 항상 사랑을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그 장면 속 여자 혹은 남자가 바로 오티스의 상담 손님이다. 참고로 1화 첫 장면의 임팩트가 꽤나 강렬한데, 썸네일과 제목으로는 이해되지 않던 청불 등급이 단박에 이해가 되는 수준이니 시청시 후방을 주의할 것.
주제가 성 상담인 만큼 자위, 임신, 낙태, 첫경험, 동성애, 리벤지 포르노 등등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에피소드로 다뤄진다.
하나의 소재를 위해 하나의 캐릭터를 만든 것 마냥 모든 캐릭터가 저마다 각기 다른 사연을 갖고있다.
그냥 지나가는 애1이 갑자기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거나, 어그로꾼인줄만 알았던 캐릭터의 말못할 고민에 마음이 짠해지기도 한다. 매 화 주인공이 달라지는 느낌이랄까.
보통 하나의 시즌을 끝내고 나면 주연과 몇가지 명장면만 떠오르기 마련인데,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는 마지막화의 엔딩 크레딧이 나타나는 순간 떠오르는 인물이 보는 사람마다 다를 것 같다. 나는 에이미와 릴리가 떠올랐다.
10대의 특징 중에 하나는 이리저리 재지 않고 자신과 타인에게 솔직한 것.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는 솔직해서 더욱 매력적인 드라마고, 솔직해야만 하는 소재의 드라마다.
시청자가 쓸데없이 캐릭터를 안타까워하거나 마음 졸일 필요가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주인공이, 주인공 옆에 친구가, 그 옆에 친구가 시원하게 내뱉어준다. 솔직하게 오고가는 대화 사이에 웃음 지뢰가 쏠쏠하게 잠복해있으니 우린 그저 집중해서 듣기만 하면 될 뿐. 이 솔직함은 자칫 피상적으로 다뤄질 수 있는 소재의 어두운 면을 가감없이 드러내어 그들의 왜 고민하게 되었는지의 핵심을 더욱 투명하게 보여준다.
가장 어른스러운 주인공들(오티스, 메이브)이 오히려 덜 솔직한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어른들은 왜 눈송이처럼 가벼운 문제에 오해를 더해 갈등이란 큰 눈덩이를 만드는지, 나같은 어른이들은 보면서 제 발이 저릴 수 있다. 솔직함은 참 대단한 무기다.
"나, 그게 잘 안되는데 어떻게 해야해?"
많은 아이들의 고민을 거슬러올라가다보면, 누군가가 못나서도 나빠서도 잘못해서도 아닌, 환경적인 요소가 고민의 시작인 경우가 많다. 어렸을 적 목격한 부부싸움, 발소리조차 내기 힘든 집, 어디서든 존중받기 힘든 피부색, 억지로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가정환경, 누군가의 장난으로 시작되어 기정 사실이 된 섹스 루머까지.
오티스는 절대 누구에게도 "네가 잘못했네"라고 하지 않는다. 들어주고, 이해하고, 당사자도 몰랐던 진짜 이유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얘기해줄 뿐.
아이들은 오티스의 조언을 단초로 삼아 스스로 문제를 돌파해나가면서 자신을,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더욱 이해하게 된다. 침대 위에서 발견한 그들의 고민은 오히려 침대 밖에서 해결되어 그들을 자라게 한다.
가장 인상깊었던 에피소드를 꼽자면 단연 5화.
메이브의 비밀과 대강당 씬(It’s my Vagina!)은 정말 아직 때묻지 않은 10대이기에 가능한 에피소드라서 퍽 마음에 남았다.
얼마 전 초등학생 남자아이에게 정관수술을 시킨 부모의 이야기를 기사로 읽었다. 그래 어디 맘껏 자유롭게 열심히 해보라는 격려의 의미인걸까.
'성'이 붙은 이슈는 수면 위로 올라가기엔 너무 아득하고 다들 쉬쉬하며 미봉책을 떠올리기 급급하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시각적인 요소들로 인해 청불 등급을 받아버린게 사실 너무나 아쉽다.
병원에 데려가 몇백만원의 수술을 해주는 것보다 이 드라마를 함께 보면서 툭까놓고 얘기하는게 오조오억배는 나을 것 같단 생각은, 내가 아직 부모가 아니라서 할 수 있는걸까.
10대의 가장 어두운 면을 가장 환하게 비추는 이 드라마. 나보다 더 격공하며 볼 10대들이 부디 엄마아빠언니오빠의 넷플릭스 계정을 몰래 빌려서라도 꼭꼭 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