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기록 (2)

카피책

by 자몽맛탄산수

문과생이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 글쓰기. 잘하는게 디폴트 못하면 문과생 맞냐 의심받는 그것, 글쓰기. 나는 오히려 학생 때보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 더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대충 어미만 바꿔서 복붙하면 되는 팩트 충만한 글(혹은 나의 대학시절 리포트)만 쓰면 참 좋겠지만, 이번에 나갈 새로운 기능을 유저들이 써보고싶게끔 알려야 한다든지, 우리 서비스가 대체 뭐하는 서비스인지 뇌리에 팍 꽂히는 슬로건을 만들어야 한다든지, 간단한 기능을 대단한 것마냥 굉장한 의미를 부여해 부풀려서 소개해야 한다든지, 인터뷰이의 심심한 대답에 MSG를 팍팍 넣어서 읽고싶게 만들어야 한다든지... 아무튼 기획자가 되어 굉장히 의외였던 것은 글을 잘 써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다양한 목적에 맞게, 그때그때 다르게 말이다.


비단 일때문에 글을 잘 쓰고 싶어진건 아니다. 혼자서 만들 수 있는 컨텐츠 중에 가장 가성비가 좋은건 단연 글이다. 여전히 핏줄 어딘가를 타고 흐르는 창작의 욕망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영상에서 글로 옮겨왔다.


영상은 같은 것도 다른 사람이 찍으면 확연히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매체다. 처음 시작하는데에 진입 장벽이 높은 반면에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장치가 쉬운 편이다. 어떤 카메라를 쓰는지, 어떤 각도로 찍는지, 누구를 찍는지, 어떤 호흡으로 편집하는지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영상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은 다르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쓸 수 있어 진입 장벽이 낮은 반면에 나의 개성을 온전히 담아내는게 참 어렵다. 내가 쓰는 글은 왜이리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밍숭맹숭한걸까.


지은이도 카피라이터, 제목도 카피책이지만 이 책은 카피라이터를 꿈꾸는 사람뿐만 아니라 나의 문장 사이사이에 좀 더 재밌게 MSG를 치고 싶은 누구라도 한번 쯤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당신이 쓰는 모든 글이 카피다"라는 부제처럼 약 30년간 카피라이터로 살아온 저자는 누구나 일상에서 카피라이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일상을 유쾌하게 만들고, 세상의 온도를 한 뼘 더 올리는 그런 문장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카피라이터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저자의 카피 철학과 카피 센스에 감탄하면서 책을 다 읽고나면 몇몇 인상깊은 카피만이 머리에 남을 뿐, 강렬한 임팩트가 남지는 않는다. 짧은 챕터로 구성된 만큼 그 안의 인사이트가 주는 임팩트도 출근길 지하철에서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가볍다. 하루 정도 몰아서 읽어버린 다음, 나중에 키보드 위에서 갈 길 잃은 손가락이 방황할 때, 고쳐도 고쳐도 답이 안나올 때, 내 글은 왜이리 재미가 없나 자괴감이 들 때 한번씩 들춰보며 머리를 환기하면 좋을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깨달은건 카피라이팅의 시작은 '문제 정의'라는 것이다. 내가 광고할 제품이 어떤 제품인지, 어떤 점이 강하고 약한지, 어떤 경쟁자와 어떤 면에서 경쟁을 해야하는지, 소비자는 누구인지, 소비자의 소구 포인트는 무엇인지 등등 제품을 둘러싼 환경과 제품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성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단어와 문장으로 MSG를 치는건 그 다음의 문제다.


인상깊었던 몇가지 인사이트와 저자의 카피를 남겨본다.


카피작법 제1조 1항. 글자로 그림을 그리십시오.

- 글을 쓰다보면 괜히 거창하고 엄청난 단어를 갖다 쓰기 쉽다. 있어보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계속 쓰다보면 공허한 껍데기로 집을 짓는 듯한 느낌이 들고만다. 구체적이게, 눈에 보이게, 상상할 수 있게 쓰자.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 문장에 간단한 수사를 더해 재미를 살리기. 때로는 생략을 통한 리듬의 맛을 살리기. 중요한건 여러번 곱하기. 문장을 나눠서 순서를 바꿔보기.


제품을 향해 달려가는 광고 - 광고는 아는데 제품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 광고는 무기징역감입니다.

- 가장 중요한 본질을 잊지 말 것.


내 위치를 확인할 것 - 넘버원 캠페인, 도전자 캠페인

- 제품의 위치와 상황에 따라서 써먹어야 하는 전략이 다를 수 있다. 결국 카피의 시작도 '제품의 문제 정의'라는 점을 느끼게 해 준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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