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로 돌아오는 방법들

나를 '현재'로 데려다주는 마음의 닻: 일상을 지키는 네 가지 기법

by 누워 사는 개발자


우리는 자주 과거와 미래를 유영하곤 한다. 그러면서 당장 내가 바꿀 수 있는 '현재'에 머물지 못한다. 우울증을 겪고 있는 나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과거의 트라우마에 발목 잡히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불안에 잠식되어, 정작 지금 해야 할 일들을 놓치곤 한다. 이 글은 내가 정신병동에 입원했을 때 배운 기법들과 퇴원 후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직접 체득한 방법들이다.




1. 몸의 감각으로 현실을 감각하기: 그라운딩(Grounding)


불안이 머릿속을 잠식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생각을 멈추고 '몸의 감각'을 깨우는 것이다. 이를 정신의학에서는 그라운딩(접지) 기법이라 한다.


눈에 보이는 것 세기: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물건을 하나씩 소리 내어 센다. "컵, 모니터, 책상..." 시각 정보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요동치던 뇌의 회로가 잠시 멈춘다.


차가운 감각의 힘: 불안의 강도가 너무 세다면 얼음주머니를 손에 쥐어본다. 손끝에 전해지는 강렬한 차가움에만 집중하다 보면,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걱정 대신 '지금 이 순간의 감각'이 선명해진다.




2. 기억하는 에너지를 아끼는 기술: TODO 앱


'사야 할 물건을 며칠째 못 사고 있다'거나 '청소를 계속 미루고 있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담아두는 것 자체가 엄청난 에너지 소모다. 우울한 상태에서는 이 '기억하는 일'조차 버거울 때가 많다.


일단 쓰고 잊기: 해야 할 일이 떠오르면 즉시 TODO 앱에 기록한다. 기록하는 순간 우리 뇌는 그 일을 기억해야 할 의무에서 해방된다.


루틴의 힘: 청소처럼 사소하지만 현재를 '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들은 매일의 루틴으로 등록해 둔다. 물론 지키지 못하는 날도 있겠지만, 목록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실행에 옮길 확률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Note: 아이폰, 맥북, 애플워치 등 모든 디바이스에서 연동되는 앱을 사용하면 기록의 문턱이 한결 낮아진다.


나는 todo mate라는 앱을 쓰고 있다.

원래 todo Mate는 친구들끼리 TODO를 응원해 주는 컨셉이긴한데, 나는 그게 부담스러워서 아무도 팔로우 하지 않고 비밀 계정으로 혼자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todo mate를 애용하는 이유는, 깔끔하고 직관적인 UX 때문이다.

(개발자분이 디자이너 출신이라고 얼핏 들은 것 같다.)


TODO Mate 앱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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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집중은 '양'이 아니라 '밀도': 뽀모도로 기법


뽀모도로 기법이란, 25분간 집중해서 일(또는 공부)하고 5분간 휴식하는 것을 1 세트(뽀모도로)로 하여, 이를 4번 반복 후 긴 휴식(15~30분)을 취하는 시간 관리 방법이다.

집중 시간에는 메신저, 휴대폰 등을 멀리하고 오직 작업에만 몰입한다.


나는 아이폰, 맥북에서 모두 쓸 수 있고, 프로젝트별 TODO도 관리할 수 있는 다음의 앱을 쓰고 있다.

Focus To-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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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력이 바닥을 칠 때 "남들은 한 시간도 잘 앉아 있는데"라며 자책하는 것은 금물이다. 집중의 핵심은 시간이 아니라 밀도다.


정말 집중하기 힘든 상황이면, 시간을 조정해서 10분만 해 본다. 그것도 힘들면 5분만 해도 괜찮다. 대신 타이머가 도는 중에는 전력을 다해서 집중을 해 보는 것이다. 집중은 양이 아니라 밀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부담 없이 시간을 조정한다.

5분, 10분이 적응이 되면 시간을 점차 늘려서 원래의 뽀모도로인 25분으로 돌아온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이 있다. 욕심을 과하게 잡아서 30분, 40분, 50분… 집중의 시간을 늘리면 대부분 나중엔 나가떨어진다.


나도 한 때 “고등학생 땐 한 교시가 50분인데 그것도 집중 못 하겠어?”라는 생각에 50분을 해 보려던 적도 있다. 하지만 50분 ‘전력 집중’은 생각보다 쉽지 않고, 그것을 반복하게 됐을 때 쉽게 나가떨어진다.

(고등학생 땐 어떻게 집중했는 지 의문이긴 하다. 기억도 안 난다. 어려서 가능했나…)


욕심을 부리다 나가떨어지기보다는 짧은 시간을 밀도 있게 채우며 서서히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4. 번외: 쏟아내되, 매몰되지 않기


현재를 방해하는 생각들이 너무 많을 땐 글로 쏟아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내가 어떤 기억 때문에 힘든지, 어떤 미래가 불안한지 가감 없이 적는다.

일단 글로 써 두면 AI에게 조언을 구하는 등,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건을 재구성해 보는 것 등이 가능하다.


특히 적은 내용을 AI에게 분석하게 하면 당장 실행 가능한 해결책을 얻을 수 있어 막연한 불안감을 줄일 수 있다.

나는 AI에게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어서 큰 TODO를 주면 잘 못하니 TODO를 제시할 땐 작은 걸로 제시해 줘"라는 말을 덧붙여서, 현실적으로 내가 실행 가능한 TODO를 얻는 데 도움을 받고 있다.


주의할 점: 일기를 쓸 때 '반추(Rumination)'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과거의 고통을 곱씹으며 스스로를 더 깊은 우울로 몰아넣고 있다면 잠시 펜을 내려놓는 것이 낫다. 20대 초반, 일기로 나를 위로한다고 믿었으나 당시 주치의 선생님은 내 일기가 반추를 심화시킨다며 쓰지 말 것을 권하기도 했다. 일기는 나를 현재로 데려오는 도구여야지, 과거에 맴도는 감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어도 때때로 현재에 머물기 너무 괴롭고 싫을 때도 있다. 그땐 그냥 좀 쉰다.. (어쩔 수 없다) 쉴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시각적 자극을 차단하는 것이다. 특히 SNS나 숏츠 등을 보는 것은 피해야 한다.


추천하는 방법은 온열 안대를 끼고, 그냥 온열안대의 따뜻함을 느껴보는 것이다. 잠이 잘 오는 유튜브 콘텐츠를 '듣는' 것도 좋다.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은 실체가 없지만, 우리의 에너지를 갉아먹는 데에는 실체가 있는 일들보다 훨씬 강력하다. 그럴 때 우리를 구해주는 것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아주 작고 구체적인 '감각'과 '행동'이다.


우리는 완벽하게 하루를 살아낼 필요가 없다. 그저 아주 잠시라도 방황하던 마음을 현재로 데려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늘 당신을 현재로 데려다준 '닻'은 무엇이었는가. 그 작은 승리의 경험이 당신의 오늘을 조금은 더 단단하게 지탱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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