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성이란 무엇인가

정상성에 집착하는 사회에서 고유한 나로 살기

by 누워 사는 개발자


가까운 이들에게도 차마 공유하지 못한 비밀 코드


나는 어린 시절의 가정사를 남들에게 쉽게 꺼내지 않는다. 누구보다 믿고 따르던 직장 상사조차 내 유년의 풍경은 알지 못한다. 폭력이 일상이었던 집에서 자랐다는 사실은 아주 소수의 친구만 알고 있는 비밀이다. 사회에서 만난 이들에게 과거를 털어놓는 일이 그들에게는 버거운 짐이 되고, 내게는 언젠가 발목을 잡을 '결함'으로 돌아올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부끄러움이라는 짐을 짊어질 이유는 없다


어느 날 문득 자문해 보았다. 나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당당해지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가해자와 이를 방관하는 사회의 책임이 명백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정작 내 아픔 앞에서는 같은 잣대를 세우지 못했을까. 폭력을 견뎌야 했던 어린 날의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나의 과거는 부끄러워하며 숨겨야 할 '레거시 코드(Legacy Code)'가 아니라, 그저 내가 지나온 삶의 한 페이지일 뿐이다.




정의되기를 거부하고 '나'로 존재하기


나는 아마 이성애자는 아닐 것이다. 양성애자 혹은 무성애자. 한 때는 나를 설명할 여러 단어를 찾아보기도 했으나, 결국 정의하기를 그만두었다. 나는 그저 나일뿐이니까.


술 한 잔을 들이키며 생각한다. 이 사회가 정한 '정상성'에서 조금 벗어나면 어떤가. 이렇게 태어난 것은 내 잘못이 아니며, 도리어 나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의 협소함이 문제일 뿐이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게 가장 시급한 업데이트였다.




사회적 민감성과 본능 사이의 줄타기


물론 마음먹은 대로 쉬운 일은 아니다. 이전에 기질 검사를 한 적이 있다. 나는 기질적으로 사회적 민감성이 높고 타인과의 관계에 예민한 편이다. 정상성이라는 궤도 안에 머물며 안도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표준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를 부정당해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본능과 자아 사이에서 치열하게 줄타기를 하며, 나는 다시 술잔을 채운다.




답답함이 아닌, 삶의 풍미를 즐기는 축배


오늘 마신 술은 더 이상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진통제가 아니다. 그저 술 자체의 맛을 음미하기 위한 기호품이다. 비록 사회가 설계한 표준 모델은 아닐지라도, 이런 나를 긍정하며 마시는 이 순간은 꽤 근사하다.


내가 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세상의 차가운 시선도 안줏거리로 삼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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