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년차 우울증 환자가 쓰는 '우울증이란 무엇인가'
저자 약력
재발을 거듭해 온 N년차 우울증 환자.
2025년 말, 대학병원 정신과 폐쇄병동을 거쳐 지금은 어떻게든 살아가는 중.
비의료인의 검증되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임에 주의할 것.
'마음의 감기'
우울증을 검색하면 많이들 하는 말이 마음의 감기란다.
나도 우울증이 '감기'였으면 좋겠다. N년 이상 감기를 앓는 사람이 있나.
정신건강의학과의 문턱을 낮추는 데에는 좋은 단어라고 생각한다. 초기 우울증의 경우 약을 잘 챙겨 먹으면 감기처럼 지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감기라고 칭하는 것은 우울증이 주는 고통에 비해 조금 가볍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삶, 그리고 종족 번영. 생물이라면 DNA에 각인된 본능이자 당연한 욕구다. 우울증은 그 생명의 본능을 넘어 스스로를 파괴하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다.
암 환자가 암을 이겨내지 못하면 죽음에 이르듯, 우울증 환자가 병에 지면 죽는다.
바로 자기 자신에 의해서.
우울과 슬픔은 혼동하기 쉽다. 물론 우울하면 슬프기도 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우울은 '무(Nothing)'의 상태에 가깝다. 모든 것이 공허한 상태. 삶의 의미도, 즐거움도, 심지어는 깊은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는 상태다.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환경적, 유전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환경적으로는 무기력하고 우울한 환경에 오랜 시간 노출된 경우다. 유전적으로는 당뇨에 걸릴 확률이 높은 체질이 있는 것처럼, 유독 우울증에 취약한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기질적으로 취약한 사람은 무조건 우울증에 걸리는가? 아니다.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관리를 통해 예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관리의 시작은 나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부터다.
정신과에서는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느껴질 때 약물을 통해 이를 조절한다. 반대로 말하면, 일상을 영위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면 그냥 사는 거다. 하지만 치료가 시급한 경우가 있다. 자살에 대한 반복적인 생각이나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질 때다. 자해나 자살 시도는 말할 것도 없는 응급 상황이다.
'항우울제 하루 5알 먹어본 사람이 알려주는, 즉시 기분 좋아지는 법' 이런 자극적인 부제로 글을 써볼까 했지만, 사실 즉시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 같은 약은 없다.
항우울제는 대체로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를 기반으로 한다. 세로토닌을 흔히 '행복 호르몬'이라 부르기에 SSRI를 먹으면 행복해질 거라 기대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불안을 줄여주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것에 가깝다.
내가 항우울제를 5알이나 먹게 된 이유는 약마다 부수적인 효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약은 잠을 잘 오게 하고, 어떤 약은 식욕을 조절한다. 내가 아침에 먹는 3알은 전반적인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한 베이스였다. 저녁에 먹는 2알은 수면을 위해서였다.
수면의 질이 낮을 때 흔히 수면제를 떠올리지만, 항불안제나 항우울제가 처방되기도 한다. 수면제는 의존성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이를 우려하는 의사들은 항우울제를 권한다. 나의 경우 입면은 어떻게든 했지만 1~2시간마다 깨는 것이 문제였다. 저녁 항우울제를 처방받은 날, 나는 처음으로 깨지 않고 통잠을 잤다.
보통 정신과에서는 항우울제를 베이스로 해서, 부수적인 증상들을 완화하기 위해 항불안제 등을 조합한다.
폐쇄병동에 입원했을 당시, 우울의 밑바닥에서 자기혐오에 허덕이다 간호사에게 물은 적이 있다. "기분이 좋아지는 약은 없나요?" 그 감정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호사는 "기분이 좋아지는 약이란 없다"라고 답했다. 대신 항불안제를 주었다.
불안과 우울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항불안제를 통해 불안을 걷어내면 우울의 늪에서 아주 조금은 올라올 수 있다. 하지만 '마법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법'은 끝내 찾지 못했다.
주변에서는 기분이 좋아지는 법으로 운동을 권하곤 한다. 물론 운동이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그것도 우울의 깊이가 적당할 때의 이야기다. 깊은 우울에 빠지면 운동할 기력 자체가 없을뿐더러, 무리하게 몸을 움직인다고 기분이 나아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예전엔 운동하면 상쾌했는데 왜 지금은 이 모양일까' 하는 생각에 자괴감만 깊어질 뿐이다.
참고로 나는 주 5일 이상 수영을 하고, 주 2일 이상 근력 트레이닝을 한다.
기분과 상관없이,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하고, 신체 건강유지를 위해 거의 매일 운동을 한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찾은 '기분 나아지는 법'은 그저 담담히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다.
처방된 약을 먹고, 매일 운동하고, 죽지 말고, 그냥 살아간다.
바로 좋아지진 않더라도 되돌아보면 어느덧 아주 조금씩 나아진다. 이전에 글로 썼던 에너지 레벨로 따지면 -4에서 시작해, 약을 먹으며 묵묵히 견디다 보면 어느덧 -3이 되어 있는 식이다. 그렇게 일상을 버텨온 결과, 지금은 항우울제를 3알까지 줄였다.
결국 질문은 본질로 돌아온다. 기분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이 기분을 잘 다스리며 무사히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애초에 행복감이란 건 또 무엇일까.
이런 생각들이 스쳐도 그 생각에 매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냥 담담히 일상을 살아간다.
중독 치료를 오래 해온 교수님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중독 치료의 핵심은 단순히 약이나 술을 끊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건강하게 바꾸는 과정이라는 내용이었다. 이게 동반되지 않으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고 한다.
우울증 치료도 이와 같다. 약의 도움을 받아 견디되, 죽고 싶다는 반추적 사고 대신 삶의 조각들을 즐길 수 있도록 나를 바꾸어 가는 과정이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따져봐도 죽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 또한 우울증이라는 병이 만든 인지적 왜곡일 것이다. 가끔 생각한다. '내게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다면 진작 죽었을 텐데. 가족과 주변 사람들도 나 때문에 마음 졸이거나 병원 다닐 일 없이 평온해졌을 텐데.'
비틀어진 세계관이다.
나는 여전히 이 우울에 중독되어 있다.
아무튼 이런 생각이 들어도 "아효 또 시작이네"라고 생각에 매몰되지 않고 일상생활을 한다.
그냥 덤덤히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한 번쯤 글로 써 보고 싶었던 '우울증론(憂鬱症論)'.
우울증을 앓으며 모은 의학 지식들과 내가 느낀 치료법을 정리해 봤다.
요즘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아이고 지겨워."
우울삽화에 빠지면 "아이고 지겨워 또 그 기억이냐". 그러고 덤덤히 일상생활을 한다.
운동하다 힘들면 "아이고 지겨워". 그러고 남은 횟수를 채운다.
우리네 어머니들이 "아이고 지겨워" 하면서도 결국엔 하시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