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안전장치: 루틴

졸라 하기 싫어도 일단 따뜻한 물 한 잔

by 누워 사는 개발자

루틴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 건 정신건강의학과 이광민 선생님의 <할 일은 많지만 아직도 누워있는 당신에게>를 읽고서였다. 제목처럼 가벼운 문체로 술술 읽히는데, 루틴 형성을 위한 팁들이 많이 담겨 있다. 팁들도 어려운 것이 아니라 바로 실행 가능한 것들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봤으면 좋겠다.


우울증 환자에게 루틴은 "삶의 안전장치"인 것 같다.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으면 반추적 사고에 매몰되기 쉽다. 루틴이 갖춰져 있으면 그 시간에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일단 일어나게 된다.

오늘만 해도 다시 시작되는 월요일이 지긋지긋하고 이상한 꿈도 너무 많이 꿨고, 수면의 질이 안 좋아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영원히 잠들고 싶다" 이런 생각들을 했다.


하지만 일단 해야 하는 게 있기 때문에 일어났다. 거창한 건 아니고 따뜻한 물과 함께 식이섬유 환과 유산균을 먹는 것이다. 변비가 심하기 때문에 먹기 시작한 것들이다. 화장실을 가는 동안에 물을 끓인다. 따뜻한 물을 들이키며 생각한다.

"아 진짜 인생 왜 사냐, 졸라 하기 싫다."

일단 서재로 간다. 졸라 하기 싫어도 일단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폐쇄병동에 입원했을 때부터 매일 쓰던 치료 일지를 써야 한다. 오늘의 수면과 에너지 레벨을 기록한다.

수면: 엉망

에너지 레벨: -3

원래는 필사도 했었는데 요즘은 남들이 하는 '인생은 아름다워',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 같은 얘기는 듣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 노트북을 켠다. 매일 아침 글을 쓰는 건 독자와의 약속이며, 나와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단 글을 쓰고 있다.


이후엔 시간을 맞춰 수영을 가고, 출근을 하겠지. 하기 싫은 마음을 이끌고 회사 생활을 하고, 집에 오면 바로 잘 준비를 한다. 이 회사로 인해 구질구질하고 지친 마음으로 아무것도 하기 싫기 때문이다. 정말 좋아하는 오은영 선생님이 나오는 예능조차 이 지친 마음으로는 보기 싫다. 최소한의 해야 할 것들—집안을 정리하고,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고, 씻는 것—을 하고 집 안의 불을 다 끄고 눕는다. 수면용 유튜브를 틀고 취침 예약을 걸어놓고 온열 수면 안대를 끼고 잠에 든다.


위는 오늘 아침의 생각들과 나의 하루 요약이다. 그냥 이런 마음이어도 매일매일 살아간다. 모두 루틴 덕분이다. 죽지 않고 매일매일 어쨌든 살아나가는 것은 우울증 치료에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이전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루틴은 그 와중에도 인생을 조금 더 '살 만하게' 만들어 준다.


루틴이 있기 이전의 나는 매일 글을 쓰지도 않았으며, 주중에는 집안이 엉망이었고, 집사로서 부끄럽지만 고양이 화장실을 하루 걸러 치울 때도 있었다. 루틴이 있기에 매일 졸라 하기 싫지만 어느 정도의 선은 유지하면서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


어쩌다 루틴에서 벗어나도 상관없다. 예를 들어 내일은 회식이 있어서 평소 내가 자는 시간보다 늦게 들어올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지쳐서 청소를 못 할지도 모른다. 그냥 자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다음 날은 특별한 일이 없으니까 다시 루틴 대로 움직인다. 하루 정도는 청소가 안 돼도 다음 날 다시 청소가 되면 집 상태는 나름 괜찮다.


그렇다면 루틴은 어떻게 만드는가. 가장 중요한 전제는 절대로 무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한 것부터 추가해 나가는 것이다.

우울증 환자는 아침에 일어나기가 어렵다. 침대를 벗어나기가 힘들다. 하지만 일단 아침에 일어나면 어쩔 수 없이 화장실에 가게 된다. 거기에 한 스푼 더 해서 물을 끓인다. 일단 물을 끓이면 아까워서라도 식이섬유와 유산균을 먹게 된다.


그 뒤에 책상에 앉는 것. 많은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그런데 처음에 루틴을 만들어 갈 때는 이것조차 안 해도 된다. 일단 "일어나서 따뜻한 물 마시기"까지만 매일 수행한다. 그러다 보면 따뜻한 물을 마시다가 문득 생각이 든다. "이것까지만 하기 지루한데, 뭔가 생산적인 걸 해 볼까?" (이미 따뜻한 물 마시기는 루틴이 되어 에너지 소모가 덜 되기 때문에 분명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럴 때 일기 쓰기 같은 걸 추가한다.


위는 내가 루틴을 만들어 나갔던 과정이고, 이광민 선생님의 <할 일은 많지만 아직도 누워있는 당신에게>에 정신의학적인 배경과 함께 루틴에 대해서 자세히 나와 있다.


다시 월요일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모두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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