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딸 대신 사무적인 성인이 되기로 했다

엄마라는 환상의 유통기한

by 누워 사는 개발자


어제는 병원 가는 날이었다. 대학병원 외래를 다니기 시작한 뒤로 엄마가 늘 차로 데려다주고 있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그저 지겹다. 그래도 매일 아침 일어나 최소한의 글을 쓰고, 수영을 다녀오고, 꾸역꾸역 일과를 버텨낸다.


그러다 문득 병원 진료에 회식까지 겹친 오늘,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고 싶었나 보다. 눈물이 흘렀다. 언제 나을지 기약도 없고 모든 게 지겹다고, 회식조차 가기 싫다고 털어놓았다. 엄마니까 내 편이 되어줄 거라는, 나를 이해해 줄 거라는 착각을 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엄마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병원 가는 길에 회사 사람들과 마주치는 걸 왜 그렇게 싫어하느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나는 신입 시절, 담배 피우는 자리에 억지로 따라가 들어야 했던 무례한 말들을 꺼내 놓았다.

"성공한 여자 CEO들 봐라, 누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느냐" 같은, 걱정을 가장한 폭력적인 말들. 그 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해왔는지 이야기했지만, 엄마의 반응은 "힘들었겠구나"가 아니었다. "너답지 않게 그걸 왜 듣고만 있었니? 담배 피우는 데는 왜 따라가고?"라는 핀잔이었다. 엄마는 내가 사회 초년생이었을 때조차 자기 주장을 다 하는 당찬 여성이길 바랐나 보다.



진료실에는 엄마와 함께 들어갔다. 엄마가 마음 아파할까 봐 늘 혼자 들어갔었지만, 인지심리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기도 하고 나도 너무 힘에 부쳐서 엄마가 내 상태를 알아주길 바랐다. 결과는 어릴 때부터 노출된 폭력적인 환경, 지나치게 높은 자기 기준, 그리고 감정 표현의 부재. 의사는 특히 자기 기준을 낮추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엄마가 물었다. "너한테 정말 폭력의 기억이 남아 있니?" 아빠가 어땠는지, 엄마는 어땠는지 구구절절 설명할 에너지조차 없어 짧게 답했다. "네." 엄마는 급한 일이 있어 먼저 자리를 떴다.



다음 날, 눈을 뜨니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또 몸살이다. 검색창에 '안 아프게 죽는 법', '확실히 죽는 법'을 쳐보지만 역시 결과가 나올 리 없다. 자살은 계획을 확실히 세워야 한다. 실패하면 며칠 뒤 똥오줌도 못가리는 채로 병원에서 깨어나고 그 이후엔 자살 시도자라고 주위에서 이것저것 내 자유를 억압하려 하기 때문이다.


병원을 알아보다가 엄마한테 온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내가 너무 힘들고 아파서, 그래도 엄마는 내 편일 테니까, 엄마는 내 엄마니까 투정부린 건데 결국 오는 건 “너 왜 이렇게 됐니” 그러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론 내리고. 메시지 왕창 보내놓고. 엄마 혼자 괜찮아지고.

엄마는 항상 그래 왔어.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고. 그냥 미안하다고 하고. 엄마조차도 나를 못 받아주고 버거운 거야.

투정 부려서 미안해. 나도 앞으론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어. 앞으론 그럴 일 없을 거야.

오늘 일어났더니 몸살기가 있어서 휴가 내고 병원 다녀오고 쉴 거야. 또 내가 약한 거겠지만.



몸살 기운 때문에 휴가를 내고 병원으로 향하며 안락사를 알아봤다. 그조차 쉽지 않았다. 비용이나 서류는 그렇다 쳐도, 왜 성인의 죽음에 가족의 동의가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차분하게 말하던 엄마도 말하다 보니 화가 났는 지 또 막말을 한다.

본인도 힘들게 버티고 있다, 너 대신 내가 정신과에 입원해야겠냐, 뒤이어 쏟아지는 욕설들. "나쁜 년, 못된 년, 싸가지 없는 년... 어떻게 엄마한테 비수를 꽂니, 사과해라."


그 순간 눈물이 멎고 머릿속이 선명해졌다. 모든 감정의 기준은 엄마였구나. 엄마라고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게 아니구나.

내 몸 하나 챙기기 버거운 이 시점에, 환갑이 넘도록 자기 감정 하나 조절 못 하는 엄마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앞으론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철저히 사무적인 태도로 답했다. 더 이상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어릴 적의 나는 경제력도, 나만의 관계도 없어 엄마에게 버려지면 끝이라는 공포 속에 살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겐 경제력이 있고, 나로부터 시작된 관계들이 있다.


우선순위는 나다.

내 건강, 내 몸, 내 직장, 그리고 나의 경제력.

가족들한텐 괜찮은 척 해야지. 맨날 힘들면 회사 그만 둬라 하니까.

잘 먹고, 잘 쉬고, 내일은 다시 나의 일을 해야지.

회사는 절대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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