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을 지나치면서 면티와 사람을 고르는 방식도 변했다. 화려한 프린트에는 이제 혹하지 않는다. 내 몸과 마음에 딱 맞아떨어지는 질 좋은 흰색 면티를 고르듯 사람을 고른다. 오래 입을 수 있는 100퍼센트의 사람을 찾아 헤맨다. 이건 더 현명해졌다는 소리일까, 아니면 더 까탈스러워졌다는 소리일까.
취향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거의 에너지 쏟지 않는다. 생각조차 안 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잘하는 데에도 에너지가 모자라다. 생활도 꽤 심플하게 바꿨다. 사람도, 물건도, 생활도 내 취향대로 하려고 한다. 정신 건강이 더 좋아진 느낌이다.
자신의 취향을 참 사랑하는구나 싶은 사람이 있다. 부럽다. 취향이라는 게 알고 보면 그냥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일단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하고, 다양한 경험 중에서 특별히 마음에 닿는 걸 발견하고, 반복하고, 또 거기에 집착해야 취향이 된다.
까탈스러워지고 있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뭐 그런 걸 수도 있다. 근데 생각해보면 취향이 확고해도, 까탈스럽지 않고 포용적일 수 있다. 포용은 싫은데 좋은 척하는 게 아니다. 포용이라는 건 취향이 없는 게 아니다. 포용은 모두의 취향을 존중하는 것이다. 먼저 나 자신의 취향부터 존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