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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

라틴어 수업 - 한동일

by 뎁씨


Si vales bene, valeo (시 발레스 베네, 발레오 / 그대가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 고대 로마인들이 편지를 쓸 때 주로 사용했던 인사라고 한다. 답이 올지 말지 가장 명확치 않은 소통수단인 편지에 가장 어울리는 인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안부도 묻고, 나의 안부도 전하고, 나의 마음도 전하고.


라틴어 수업.

한국인 최초, 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 한동일 교수님께서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서강대학교에서 '라틴어 수업'이라는 서강대 역사상 최고 화제의 교양수업을 진행하며 들려주었던 이야기들 중 일부를 책에 담았다. 내가 대학교를 다닐 때 열려있던 강의인데, 왜 나는 이런 꿀 같은 소식을 듣지 못했을까. 서강대학교랑 집이랑 가까웠는데. 사실 알았다고 해도 노느라 바빠 청강 같은걸 하지는 않았겠지.


unnamed (1).jpg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우선 이 '라틴어 수업'은 언어학 개론이 아니다. 라틴어의 주어 동사 목적어 형용사 단어들을 늘어놓고 시험을 쳐야 하는 것들이 아니다. 유럽 언어의 뿌리인 라틴어를 통해서 말과 행동에 어떠한 뿌리가 스며들어 있는지, 그것들이 만들어낸 시간과 문화를 통해 삶은 무엇이고 어떻게 좋게 살아가면 좋을지를 되돌아보는 '언어학'이 아닌 '감성 철학' 교양이다.


나는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어를 할 줄 아는데, 가끔 내가 인도네시아어를 말하는 것을 듣게 되는 친구들이 '혹시 지금 라틴어로 말했냐' 물어보기도 한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면 스페인어는 아닌 것이 확실한데 뭔가 좀 더 단단한 느낌이 들어서 그랬다고. 그러면 '그래 맞아 라틴어야, 똑똑하네'라고 말하고 조금 지내다 보면 라틴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 민망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친구의 눈썰미가 나쁘지 않은 것이, 인도네시아는 과거 300여 년간 네덜란드 식민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수많은 네덜란드어의 영향이 남아있다. 네덜란드어는 물론 라틴어에 직간접적 영향이 있었고, 또 '인도네시아'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듯 '인도' 와도 지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가깝다. 라틴어는 고대 인도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인니어와 라틴어는 닮은 단어들이 꽤 있다. 라틴어 Gratia (그라티아, 감사/축복) 은 인니어 Gratis(그라띠스, 무료로), Qualitas (쿠알리타스, 품질)은 인니어 Kualitas (꾸알리따스, 품질) 이런 것처럼 뭔가 라틴어/스페인어 느낌이 나는 단어들이 꽤 있다. R발음을 'rrr' 하고 길게 굴려 끌기도 하고, 영어의 형식보다는 확실히 라틴쪽에 가깝게 레터링이 형성되어 있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무언가 큰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나에게는 생각보다 가까웠던 언어지 않았을까.


라틴어를 쓰는지도 모르겠다는 오해를 몇몇 겪었던 사람으로 라틴어 자체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긴 하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는 그저 교양처럼 스페인어를 조금 배우고 독일어를 조금 배우고 그러다 보니 유럽권 언어는 대충 뭐 라틴어와 닮았구나 그리고 여기저기 사용되는 공용어 영어 또한 그렇구나, 그렇다면 라틴어로부터 우리 모두의 문화와 생각에 완전히 독립적일 수는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더 들었다.


요즘 주변인들은 빈번히 2개 국어, 3개 국어씩 하기도 하고 누구는 대여섯 개 국어를 능통하게 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조기교육, 유학을 떠나기도 하고 직장인들은 회화수업을 들으며 자기 계발에 매번 애쓰는 일도 많다. 그것이 나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기도 하지만, 능력 이면에 언어라는 그 목적, 초기의 본질을 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 책에 많이 담겨있다.


라틴어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의 어원은 어땠는지, 무엇을 보고 그 단어가 시작되었는지, 이런 언어의 기원을 찾아가는 일은 나를 항상 가슴 뛰게 한다. 그렇게 가장 고대의 언어인 라틴어가 씌여지던 일상과 목적,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며 라틴어 수업이 시작된다.


힘들어하는 나의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 Hoc quoque transibit!',


오늘 하루를 즐겨라 '카르페 디엠 Carpe Diem',


최고 중에 최고, 정말 잘했어 '숨마 쿰 라우데 Summa cum laude'.



어디서 한번 즘 들어보았을 법한 이런 아주 오래된 흔한 라틴어들은 이렇게도 희망적이고 따듯하다. 우리가 처음 말이라는 것을 할 때, 분명 전하고 싶었던 무언가 다른 것이 있지 않았을까. 조금 솔직하게 마음에 충실한다면 다른 말을 하지 않았을까. 사실 우리는 조금 더 따듯한 사람이지 않았을까.

남들보다 새롭고 대단한 언어를 배워가는 만큼 새로운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영혼의 동반자들이 늘어났는지 생각해본다. 나는 말을 잘하는 사람은 되었지만 말을 잘 전하지는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경쟁적이고 앞서 나가야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더 많이 해야 하고 더 많이 가져야 하고, 그것이 생존이라는 가치에 부합하는 자세가 맞고, 그 가운데에 있는 나도 그만큼 편협한 사람이다.


'생존'은 가혹한 시련을 싸워 이겨내야 하는 싸움판이지만 '삶'은 조금 더 추억 많은 별이 뜨는 캠핑장이었으면 좋겠다. 과학을 사랑하지만 문학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싸워야 하는 수많은 내 경쟁자들 사이로 내 사람도 그만큼 더 많았으면 좋겠다. 모든 것이 욕심이라면 나는 끝끝내 단 한 사람 만이라도 손을 잡고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쏘아붙이는 말 한마디보다 배려하는 말 한마디로 조금 친근해졌으면. 속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말랑한 말들이 여기저기 남는다면 주위는 좀 더 달달한 사람들이 남지 않을까. 이 책을 한 장씩 넘겨가며 라틴어의 그 따듯함이 모두에게 채워져 가길 바란다. 그대가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로 힘든 일들이 너무 많다. 더 많은 편견과 차별, 미움이 차갑게 있겠지. 하지만 따듯함은 벌써부터 오고 있었다. 출근길에 하얀 매화가 하나씩 피어나는 것이 보이고, 어느새 개나리도 필 거고 눈앞이 흐드러지게 벚꽃도 필 거니까. 조금 더 위로하며 조금 더 따듯한 날이 오기를.


Dum vita est, spes est! (둠 비타 에스트, 스페스 에스트!)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습니다!


모두 건강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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