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어택
주말 아침이면 홍대 거리에는 쓰레기가 넘쳐난다. 간밤에 북적이던 인파들이 흥청거리며 남긴 잔해다. 이따금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미화원 분들도 눈에 띄지만 그분들은 간신히 거리를 다시 걸을 수 있게 할 뿐이다. 미처 회수되지 못한 쓰레기의 대부분은 먹다 버린 플라스틱 음료 컵들이다. 우리는 부지런히 이 컵을 주워 담았다.
플라스틱이 재활용된다고 순진하게 믿던 시절 그래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니까 플라스틱을 분리배출하며 마음의 찜찜함도 털어버릴 수 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영화 플라스틱 차이나의 충격은 한동안 헤어나오기 어려운 불편함이 되었고, 대부분의 플라스틱이 소각되거나 매립된다는 사실의 자각은 나를 길거리로 인도했다.
우리는 조를 나누어 길거리의 플라스틱 컵을 주웠다. 음료의 대부분이 그대로 남은 컵들은 내용물을 하수구에 비웠다. 컵과 종이 홀더를 나눠 담고, 컵과 빨대를 분류했다. 이날 우리 30여명이 한시간 동안 주워담은 컵의 수는 800개 가량이었다. 모은 컵을 가져와서 물로 행군 뒤에 브랜드 별로 나눴다.
이날 우리가 하는 행동의 이름은 '플라스틱 컵 어택'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길거리에서 플라스틱 컵을 주운 뒤 브랜드 별로 분류하고 기록하고 가장 많이 나온 브랜드의 컵을 해당 매장에 되돌려 주는 것이다.
이 행동의 기원은 영국의 플라스틱 어택 운동에 있다. 마트에서 장을 보면 온갖 플라스틱 포장재를 같이 사야만 한다. 집에 와서 포장재를 분리하다 보면 누구라도 마음에 불편함이 들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불편함에 목소리를 낸 운동이다. 단체로 마트에 가서 장을 본다. 마트 앞에 모여 포장지를 따로 모은다. 얼마나 많은 포장지가 나왔는지 보여주며 우리는 이런 포장지를 원하지 않는다고 목소리 높여 항의하는 것이다. 주어진 대로 물건을 소비하는데 그치는게 아니라, 우리가 사고 싶은 물건은 어떻게 포장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생산되어야 하는지 생산자에게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플라스틱 컵 어택은 이를 길거리에 나뒹구는 플라스틱 컵에 적용한다.
지난 몇 년 간, 플라스틱 어택과 플라스틱 컵 어택은 수차례 진행되었다. 자주하다보니 매뉴얼도 제작했다. 내게 눈에 띄는 점은, 행사 참여자 대부분이 보통의 시민들이라는 것이다. 나처럼 환경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거나, 아직 학생인 시민들이었다. 이들이 왜 이른 아침 길거리로 나와 불편함을 감수하고 목소리를 내게 되었을까.
이날 우리가 가장 많이 모은 컵 브랜드는 메가커피였다. 우리는 컵을 들고, 피켓을 들고, 메가커피 매장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신나는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우리 행동은 무겁기 보다는 활기찼다. 사람들에게 불편한 말을 꺼내야 하는 자리였지만 동시에 우리 스스로 즐거운 시간이어야 한다는 걸 우린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매장에 도착한 우리는 빠르게 포즈를 취하고, 구호를 한번 외치고, 우리의 취지를 이해시키며, 재활용을 부탁하며, 컵을 전달한 뒤, 해산했다.
이런 환경문제는 종종 알아갈 수록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나 하나 아무리 텀블러를 써봤자 주변의 그보다 훨씬 많은 테이크아웃 컵들을 보면 아무 소용 없는 짓만 같고, 이런 불편함을 주위에 토로해 보면 운이 좋아야 착하다는 평가 한마디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사실 그들 대부분도 느끼는 불편함이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이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누구나 사정은 있고 누구나 바쁘게 사는 세상이니까. 그러나 이런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은 분명 곳곳에 있다.
나는 지난 몇 년간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답답함을 털어 놓는 것만으로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작당모의를 하기 마련이다. 함께 변화를 상상하고 행동하면 무언가 내 손으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그런 상상은 실제로 일어난다. 우리의 목표는 단지 일회성 행동이 아니라 일회용 컵 보증금제를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카페에서 소비자가 테이크 아웃 컵에 음료를 담아 갈 때는 단 100원이라도 돈을 더 받아서 일회용 컵 사용을 억제시키고 보증금을 이용해 컵 재활용을 촉진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정책에 반영해서 더 근본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수 차례의 시민 참여와, 언론을 통한 압박, 그리고 국회의원들에게 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돌렸으며, 몇몇 적극적인 사람들은 국회의원 사무실까지 방문했다. 그 결과 일회용 컵 보증금제는 2020년 5월에 국회를 통과하게 되었고, 2022년부터 시행 예정이다.
우리는 이따금 너무나 거대하고 경직된 세상에서 무력함을 느끼지만, 사실 세상은 작은 개개인이 모인 공간일 뿐이고, 이 개인들 몇 명만 모여도 힘이 생긴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직접 체험하고 느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시작은 나의 불편함을 같이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데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