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을 인연으로 만들어 자리를 함께하다.
눈에 둘러 쌓였던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아침 해가 일찍 뜰수록, 내가 수면에서 깨어나는 시간도 앞당겨졌다.
오늘은 눈을 뜨니 아침인지 새벽인지 모를 5시였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엔 조금 피곤하고 계속 누워있기엔 머리가 점점 맑아진다.
일어날까 말까 수십 번 고민하다가, 이렇게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기엔 아까운 마음이 들어 몸을 일으킨다.
침대 아래에서 자고 있는 고양이를 냉큼 안아들고는 사랑한다고 아침 인사를 전한다.
귀찮은 듯이 애옹 거리는 고양이를 내 배개에 올려두고는 이불을 정리했다.
어제 작성하고 잔, 오늘 스케줄을 훑어본다.
누군가는 백수가 왜 이리도 바쁘냐고 묻겠지만,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나의 하루가 좋다.
오늘의 가장 큰 일정은 우연히 알게 된 헤드헌터 이사님과 점심 약속이 있었다.
일 때문에 알게 되었지만 우리는 일이 아닌 사이로 만나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조금은 쌩뚱맞고 재미있는 조합이다.
그녀는 첫 통화부터 임팩트가 강렬했다.
목소리에 비비드한 색깔이 묻어나던 그런 사람이었다.
"딕션이 너무 좋으세요~ 과거가 궁금한데요?"
그녀는 나와의 첫 통화에서 나의 과거를 물었다. 그리고 나는 긴 경험을 짧게 나누었고 그녀는 수화기 너머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적어도 그녀의 목소리는 그랬다. 그녀는 제약회사에서 커리어를 쌓았는데, 일을 관두고 남편 따라 싱가폴에 갔다가 집에 가만히 있기 우울해서 모 방송사의 리포터에 도전했다고 했다. 그리고 한동안 리포터로 일을 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언제 만나서 이야기 좀 해요."
누군가는 빈말이라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삶을 복잡하게 살고 싶지 않다. 난 만나지 않은 그녀가 궁금했다. 나는 그녀의 농담반 진담반의 제안에 흔쾌히 Yes를 외쳤다.
"언제 가능하세요?"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한참 이른 시간, 삼성동에 도착했다. 출근 시간이었다.
삼성역과 선릉역 직장인들은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도 불과 4개월 전에는 이곳에서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는데, 시간은 느린 듯 빠른 듯 했다.
회사에 들어가기가 너무 싫은 어느 아침이면, 선릉역 부근에 있는 아티제에 들어가 분노의 글을 썼다.
그렇게 한참 글을 쓰다 보면 글인지 낙서일지 모르는 무언가가 채워지고 나는 회사로 발걸음을 향했다.
내게 회사란 어떤 곳이었을까. 적어도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은 아니다.
11시 20분, 약속 장소로 향했다. 몇 분이 흘렀을까, 내 이름을 경쾌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였다. 나의 키는 174cm, 여자 치고는 제법 큰 편이었는데, 그녀와 나의 눈높이는 신기하게 일치했다.
서로의 키를 물어보며 어색한 첫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의 키는 173cm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우연이다.
유선 상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던 헤드헌터와 이렇게 얼굴을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문뜩 옛날에 소개팅 하던 때가 생각난다.
그 어색한 공백을 견디지 못해 혼자 한시간 두시간을 떠들다가 지쳐서 돌아오곤 했던 것 같은데. 벌써 오랜 추억이다.
그녀와 나는 선릉역 부근의 식당의 바 테이블에 나란히 자리했다. 그녀는 통화에서 만큼이나 경쾌한 목소리를 자랑했다.
"오늘 아침에 읽은 책이 새는 날 때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였어요. 돌아보면 후회 없는 삶이 어디 있겠어요."
그녀는 가벼운 듯 가볍지 않은 철학을 툭 내려놓았다. 이상하게 우린 서로의 주파수가 맞는 듯 묘하게 서로에게 이끌렸다. 그녀는 72년생. 자그만치 나보다 20살이나 많았다.
"말도 안돼요! 어떻게 저보다 20살이나 많으세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더 놀란 표정 지어줘요."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어색한 공백을 내어주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꼭 나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린 처음 만났기엔 너무 자연스러웠다.
밥을 다 먹은지는 한참이지만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계를 보고선 자리를 나섰다.
"우리 첫 만남에 별의 별 이야기를 다하네요."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워 근처 카페에서 음료를 테이크아웃 했다. 따뜻한 바닐라 밀크 한 잔을 들고 선릉을 거닐다가 그녀는 말했다.
"그러게요. 제 생각에도 그래요. 이사님과 한 몇 년은 알고 지낸 사이 같은데요."
그녀는 나와 비슷한 결의 사람이었고, 나와 비슷한 선택을 먼저 해온 선배였다.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 남들이 보기에 조금은 쌩뚱 맞고 하지 않을 법한 선택들이 가득했다.
"지나고 보니 그 조각들이 이어져서 오늘인 것 같아요."
30년 전, 주변에서 모두가 뜯어 말릴 때 그녀는 홀로 호주의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그리고 낯선 땅에 자리한 그녀는 허리에 작은 주머니를 차고 옷 장사를 했다고 한다. 사는 게 어렵고 힘들 때, 그때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못할 일이 뭐가 있겠냐는 그런 생각이 든다고 했다. 엔딩 아는 드라마는 재미가 없다는 그녀. 문뜩 나도 이런 50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로는 알지만 불안했던 순간에,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요."
그녀는 내게 그 어떤 답을 내어주지 않았지만 괜찮다는 이야기를 그녀의 삶을 통해 내게 건내 주었다.
우리의 시작은 일이었지만 우리의 접점은 대화였다.
"선릉에 오면 항상 좋은 대화를 나누고 가서,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과 와요. 함께 해서 덕분에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두 시간이나 되는 대화 끝에 그녀는 회사로 돌아갔다.
"이사님 바쁘시겠지만, 다음에 또 시간 내주실꺼죠? 저랑 놀아주세요!"
평소에 부리지 않는 애교를 부려본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자기가 할 소리라며 또 보자고 나를 안아주었다.
갑자기 웃음이 났다. 괜찮다는 얘기를 온몸으로 해주는 그녀에게 고마웠다.
헤드헌터와 구직 의사 없는 백수 사이의 기묘하고 즐거운 수다 타임. 나는 특별한 목적 없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이런 대화를 참으로 사랑한다. 나와 주파수가 비슷한 그녀의 우주를 만난 즐거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