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11월 늦가을, 이른 아침 플랫 화이트 마시기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나의 고요. 그 공백을 위하여

by 데비안

이른 아침, 그것도 아주 이른 아침 집 밖을 나섰다.

쉼에 대한 권태로 잠시 현업으로 복귀를 한지 반년이 지났다.


출근 길만 1시간 40분.

회사가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기에 에고를 빼기로 결심한 것도 잠시,

책임이라는 이름은 계속해서 중심을 잡고 흔들었다.


관계와 나 사이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출근 시간은 점점 앞당겨졌다.

아침의 공백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6시 20분, 집에서 나섰다.


'이러다가 5시에 나가는 거 아니야?'


아파트 현관 문을 열고 나서자 해도 뜨지 않은 짙은 어둠이 나를 반긴다.

늦가을비일까 초겨울비일까.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버스 정류장을 향하는 거리에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외근으로 차려입은 정장과 구두가 젖었다. 축축한 앵글 부츠 안 발에 찜찜한 짜증이 올라온다.

하루 종일 이 찜찜함을 어찌 버틸까.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떤 액션도 할 수 없는 현재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로 결심한다,


M버스를 타고 팟캐스트에 잠시 넋을 내려둔다.

이른 출근에 피로한 사람들일까. 버스 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역사와 이야기를 좋아했지만, 부쩍이나 자본주의에 영혼이라도 팔린 듯 재테크 공부를 해야한다는 마음에 경제 채널을 들여다본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 때문이려나, 선택권을 사고 싶다는 마음 때문일까. 평생 크지 않았던 자본에 대한 조급함이 드는 요즘이다.


집중하지 않을 경제 팟캐스트 하나 쯤 켜놓고 얼마나 넋을 빼었을까.

종로3가에 도착했고, 버스를 갈아타고 회사 앞에 내렸다.


'7시 50분이니, 그래도 1시간의 자유는 벌었네.'


회사와는 너무 가깝지 않지만 그래도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지 않은 그런 조용한 카페를 찾는다.

나와 회사 사이는 그 정도 거리가 필요하다.

그렇게 목적지를 찾아 발걸음을 향했다.


'영업을 하는걸까, 아님 밖이 어두워서 일까.'


카페의 문을 열어본다. 인터넷에서 보이던 느낌과는 사뭇 다른 고요함이 나를 반긴다.

원두 그라인더 돌아가는 소리와 카페를 가득 채우는 감성 팝(장르를 정의할 수가 없다)이 들린다.


'아 따뜻하다'


따뜻일까, 포근일까.

OO 감성 타이틀에 시끄러운 사진 촬영음이 들려오지 않았다.

적절한 공백과 여유가 내게 주어졌다.


선택에 있어서 후회하기 싫다는 감정으로 수없이 많은 선택지를 고민하고 비교하던 일상도 잠시,

이런 날에는 거침없이 플랫화이트를 주문한다.


으슬으슬한 멜버른에서 마신 따뜻한 플랫화이트의 추억 때문일까.

우유의 끈적임이 싫어서 라떼는 마시지 않았었는데.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날에는 따뜻하고 폭신한 우유 거품이 들어간 카푸치노를

공허하지만 혼자 있고 싶은 날에는 조금 더 진득하고 실키한 플랫 화이트를 시킨다.

그리고 넓고도 작은 유리창 가까이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나의 공백 속에서 홀로 이 시간을 지켜봐야지.

나의 황홀한 공간을 누구에게도 쉽게 내어주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커피가 나오기 전 5분, 이 순간에 좀 더 몰입한다.


음악와 그라인더 소리 사이로 갓 구운 스콘 냄새가 풍겨온다.

출근 길의 직장인이 한 명씩 테이크아웃으로 커피를 주문한다.

이 고요한 공간에 타인이 계속해서 들어오지만 그들도 그들의 공백을 충분히 즐기고 있기 때문일까.

나의 공백을 해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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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나온 플랫화이트를 모금 입에 머금는다.

기분이 좋다.

뉴욕 센트럴 파크 근처의 작은 카페 창가 어딘가에 앉아서 보내던 시간이 생각난다.


추억도 좋지만 오늘에 더 깊이 머물러보자고 다짐한다.

언젠가 이 기억의 조각을 꺼내 다시 추억하더라도 즐겁게.


나는 그 누군가의 침범도 허용하지 않는

11월말, 늦가을*이른 아침, 홀로 앉아 마시는 따뜻한 플랫화이트가 참 좋다.

(*초겨울과 늦가을 사이의 고민에서, 지금의 내가 더 누리고 싶은 가을로 정했다.)


나의 오늘 나의 하루를 절실히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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