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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vil Jun 27. 2016

10#뮌헨 : 노이에 피나코테크 PartⅢ

Neue Pinakothek. "빛"의 또 다른 이름, "인상주의자들"



위대하다는 것을 단번에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위대함을 찬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이며, 결국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찬탄한다는 것, 그것은 내가 배워야 할 또 하나의 예술인 것이다. 첫눈에 마음에 든 것은 이상스럽게도 오래도록 지속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하니 말이다.





붉은 벽이 인상적인 노이에 피나코테크 전시실 7 [Red wall of hall 7 in Neue Pinakothek]


창조적 모색


잠시의 휴식이 끝난 후,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작가들과 작품은 아니지만, 자연을 이상화하고 미를 추구하는 방법에 찬사를 보낸, 독일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작품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전시실 16을 시작으로, 인습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을 탐구한 작품들을 전시실 17에서 만나게 된다. 


좌 : 안젤름 포이에르바흐 [모란] / 우 : 아돌프 폰 힐데브란트 [그물을 이고 있는 짐꾼]


다음 문턱을 넘어서면 숨 막히는 시간에 접어들 것이라고 예고라도 하듯이, 르누아르를 연상케 하는 풍부하게 넘쳐나는 빛과 색채의 향연에 빠져드는 공간으로 한걸음을 내딛는다. 그러나 독일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작품에는 르누아르의 작품에서 보이는 것 같은 그런 빛나는 천진함은 전혀 없다. 그림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단지 낯과 밤, 맑고 흐린 날의 단편적인 묘사일 뿐이거나, 삶의 희로애락을 머금은 사람들의 일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도드라져 보이게 할 뿐이다.


좌 : 로비스 코린트 [에드워드 그라프 폰 케이저링] / 우 : 막스 리버만 [뮌헨의 맥주정원]




그야말로 "선택된"


이런 아쉬움을 남기고 다음의 설렘을 기대한 채, 즐거움과 상상력을 숨길 수 없는 은밀한 피난처인 전시실 18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루벤스의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정적인 빛만이 존재하던 전시실 17과는 대조적으로 전시실 18의 빛은, 옥외의 충만한 햇빛을 모조리 모아놓은 듯, 내부의 형태들을 집어삼키고 있는 어움속에서 밝고 경쾌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러한 빛의 향연은 전시실 18에서부터 전시실 21까지 결코 그 끊임이 멈추지 않는다. 


노이에 피나코테크 전시실 채광 [Skylight of Neue Pinakothek]


이 곳에는 에드가 드가[Edgar Degas],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폴 고갱[Paul Gauguin],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오귀스트 로뎅[Auguste Rodin], 폴 세잔느[Paul Cézanne],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까지, 일종의 정식 만찬에 초대받은 듯한 착각에 빠질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게 했다. 그야말로 "선택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은 유혹이 들 정도로...


푸른 벽에 걸린 클로드 모네의 [수련]


전시실 18부터 21에 전시된 작품들을 미술사적 양식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찬찬히 살펴본 종전의 작품들처럼 관람하는 것은 무의미한 낭비이고, 몰취미하고 생각 없는 행위이지 않을까? 재아무리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자신이 동경에 마지않은 그림들을 대면하게 된다면, 다른 여타의 작품들과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가식적인 태도는 취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을 끊임없이 회피하려고 하는 것이며, 양심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것이리라. 이곳에서부터는 인상주의니 상징주의니 하는 미술사적 관점보다는, 그저 조용히 그 찰나에 몰두한 채, 그래서 눈은 부드러운 지중해의 푸른색 벽에 잔잔히 떠있는 그림 위를 미끄러져 가고, 가슴으로는 시각이 감지하는 모든 것의 의미를 느껴야 할 것만 같다. 단지 짧은 순간에 신경이 분산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래야만 하는 것만 빼고는....


좌 : 폴 시냐크 [센느 강변의 싸무아] / 우 : 카피유 피사로 [우퍼 노우드 거리]


항상 나는, 처음으로 '인상주의자들'이라고 조롱한 어떤 비평가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 비평가가 생각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의 작품은 다른 어떤 어휘를 사용해도 표현할 수 없는 ‚'인상'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달리 어떤 말이 필요했을까? '인상주의자들'이 아닌 그 무엇으로 불러야 했단 말인가? 그것들이 주는 '인상'이란... 그리고 '인상주의자들'이 주는 그 '인상'이라는 것은 이렇게도 재각기 모두 다르지 않은가... 


에두아르 마네 [뱃놀이] /  [아뜰리에서의 아침식사]


마네[Édouard Manet]의 '빛'은 한낮 옥외의 환한 빛으로, 과거의 어떤 작품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현실감 있는 빛으로 느껴지고, 모네[Claude Monet]의 '빛'은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빛의 마법에 눈을 뜨게 해 주었으며, 르느와르[Pierre-Auguste Renoir]의 '빛'은 밝은 색체들 속의 화려한 형태들과 소용돌이치는 삶의 혼잡함이 햇빛과 공기 속에 용해되어 있는 착각에 빠지게 했으니... 

그들의 그림에는 전통적인 방식의 입체감은 묘사되어 있지가 않다. 사람들의 머리는 평면적으로 보이고, 심지어 빛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들의 코는 튀어나온 것으로도 묘사되어 있지도 않다. 그러나 과거의 어떤 작품들보다도 더욱 현실감이 있어 보이고, 그림 속의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 보고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하니 말이다. 그래서 그림 전체는 평면적이 아니라, 그 반대로 '진짜' 입체감을 느끼게 해 준다. 


좌 : 툴루즈 로트렉 [셀레랑의 청년 루티] / 우 : 에드가 드가 [다림질하는 여인]


이런 놀라운 효가가 생기는 것은 화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중앙에 나타난 벨벳 같은 짙은 어두운 색 때문일 것이리라... 드가의 그림 속 여인의 청명한 회색 스커트나, 마네의 범고래 색의 배나, 또는 모자를 쓴 남자의 강열하고 부드러운 검은색 벨벳 재킷이라던가, 모네의 수면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검은색 배들, 르누아르 그림 속 여인의 검정 리본, 마지막으로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의 그림에 있는 남자가 쓴 따뜻한 짙은 회색 모자처럼... 그래서 각 장면들은 빛에 감싸인 것처럼 전면에 대담무쌍하게 튀어나와 있는 것으로 보이며, 다른 여타의 배경들은 그들 뒤로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좌 : 에두아르 뷔야르 [카페 전경] / 우 : 르느와르 [소녀의 초상]


그들이 입은 옷이나 또는 사물들이 프란스 할스[Frans Hals]나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Velázquez]의 그림처럼 세세하고 자세히 보였다면, 이 그림들은 멋없고 생동감이 없는 그림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이런 인상에는 일상생활적인 한 장면의 진정한 '인상'이 있다. 아마도 그들은 공기 중에 가득 찬 빛의 효과와, 그 속에 젖어 있는 모든 사물에 매혹되었던 것 같다. 햇빛과 알록달록한 그늘의 흐뭇하고 아름다운 조화를 발견할 때마다, 빛의 마술적 효과와 공기가 그림의 주제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며, 그래서 어떤 풍경화가들 못지않게 신중하고 훌륭한 솜씨로 색조와 색채의 균형을 이루어 내었던 것 같다. 


포스트 모던한 노이에 피나코테크 전시실 벽 컬러


인상주의자들의 그림 속 주인공들은 햇빛과 공기 속에 용해되어 윤곽이란 것은 흐릿해져 있다. 그들의 그림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고, 그저 그 분위기를 좋아했던 것 같지도 않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시시각각 변하는 '빛'이었으며, 빛과 그림자의 상호작용이나 운동, 공간을 암시할 수 있는 방법으로, 모든 그림은 '현장에서' 실제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연이나 사물은 구름이 해를 가리며 지나가거나, 바람이 문 위에 반사된 그림자를 부서뜨림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데, 이를 재빨리 화폭 위에 옮겨놓지 않은면 안되었던 것일까? 그래서 그들의 그림은 얼핏 보면 마무리 작업의 결핍, 즉 되는 대로인 것처럼 보이거나, 기분 나쁜 기벽처럼도 보인다. 그렇지만,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저 눈에 적절한 암시를 주기만 하면, 눈은 우리가 거기 있다고 알고 있는 형태 전체를 만들어 줄 것이다. 이것이 전시실 18과 20에서 본 '빛'이었다.


노이에 피나코테크 전시실 22 [Hall 22]


그러나 전시실 19와 21의 빛은 이와 사뭇 다르다. 이전의 빛이 자연의 찰나를 담고 있는 빛이라면, 이곳에서의 빛은 인간 내면의 감정을 색채와 형태로 충실히 표현한 '빛'이다. 그리고 이 빛은 폴 세잔느와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에게로 귀결된다. 이들이 표현한 빛에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예술의 완성이라는 이상을 작품 속에서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열적인 투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폴 세잔느 [서랍장과 정물]


우선 세잔느[Paul Cézanne]는 자신이 느낀 인상에 따르고, 그가 본 그대로의 형태와 색채를 그리고자 했다. 또한 명료한 짜임새의 작품을 그리기를 원한 동시에, 그만큼 강렬하고 순도 높은 색채를 좋아하고 이를 거침없이 화폭에 담았다. 이런 질서 정연한 조합 속에서 나타난 빛이 세잔느의 '빛'이리라. 하지만 그의 빛에는 많은 비밀이 내재되어 있다. 그가 무엇을 원했으며, 무엇을 이루려 했는지, 그의 색조에서 나타나는 빛은 어떤 '빛'인가 하는 그런 비밀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세잔느는 "푸생[Nicolas Poussin]"의 그림에서처럼 웅대하면서도 평온한 분위기를 지닌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점은 그의 자화상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데, 단순하고 명료한 형태에 대한 집중으로 인해, 전체에서 발하는 빛은 조용하면서도 웅장하게까지 느껴진다. 


폴 세잔느 [하얀 터번을 쓴 자화상] / [언덕을 절단한 철도] / [언덕을 절단한 철도] 부분


이와 같은 차분함은 마네가 그린 모네의 초상이 다만 재치 있게 그린 즉흥적인 작품처럼 보이게 할 뿐이다. 이러한 빛은 그의 정물화에서도 느낄 수가 있다. 얼핏 보면 솜씨 없어 보이지만, 단순 명료한 형태에서 색채의 밝음과 깊이의 느낌을 여과 없이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세잔느의 사과는 언제나 '정말로 먹고 싶은 사과'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세잔느의 '빛'이고 '인상'이다. - 사실, 세잔느의 정물화는 회화사 중 가장 까다로운 주제이기에, 그래서 여기서는 간단히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만 나열하고자 한다.-


고흐의 해바라기가 전시된 전시실 21 [Hall 21]


하지만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빛'은 세잔느의 빛과는 사뭇 다르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이기까지 한 "빈센트 반 고흐". 하지만 나의 눈에 처음 들어온 반 고흐의 '빛'은 세련과 아름다운 빛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안을 줄 수 있는 가식 없고 '소박한 빛'이었다. 그의 붓 자국은 자신의 격양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고, - 대부분 화가들의 붓놀림은 그들의 탁월한 기량 및 재빠른 감각, 그리고 어떤 정경을 실감 있게 상상할 수 있게 해 주는 마술적인 능력을 보여준다.- 그의 정신상태에 대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해 주려는 듯 보인다. 마치 글 쓰는 사람이 강조하고자 하는 단어에 밑줄 긋듯이, 두텁게 물감을 덧칠하여, 그의 강렬한 감정과 영원의 기분을 색의 광채와 진동을 통해서 본능적으로 이야기하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빈센트 반 고흐 [아를 풍경]


또한 그가 즐겨 그린 평범한 소재들은 그의 감정을 전달하고 남들도 그렇게 느끼기를 바란 듯하다. 너무나 복잡하고 광기 어린 그의 정신세계에서 한순간이라도 벗어나고 싶어서인지, 그의 그림은 너무나 단순했다. 그래서 그는 정확한 묘사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해바라기가 담겨 있는 화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보이고, 그 해바라기 조차도 화병에서 쏟아져 나올 둣 하다. 또한 그가 그린 들판은 바람이 부는 듯 일렁거리고 있으며,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조차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금세 바람과 함께 흘러갈 것처럼, 조화롭고 열정이 담겨 있어 보인다. 


빈센트 반 고흐 [좌 - 위 : 해바라기] / [좌-아래 : 배틀짜는 직조공] / 우 : [오베르의 초원] , 부분


그 모든 것들에는 내밀함을 드러내고 있었고, 세세하게 연출되어 있었다. 만약 반 고흐가 자신의 그림을 통해 자기가 느낀 감정을 표현하고, 남들도 자신이 느낀 감정을 함께 공유하기를 원했다면 그것은 완벽하게 성공한 듯하다. 그가 그린 해바라기, 빈 의자, 실편백 나무 및 몇몇 초상화는 천연색 복제판으로 널리 보급되어 평범한 실내에도 흔히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애틋한 정과 꿈, 그리고 소망이 담긴 소박한 빛이 반 고흐의 '빛'이며, 자신의 그런 염원으로 지금까지 세계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노이에 피나코테크 전시실 22 [Hall 22]


반 고흐를 이야기하면 항상 옆에 있을 것 같은 한 사람, 폴 고갱[Paul Gauguin]이 있다. 역시나 노이에 피나코텍에도 반 고흐 옆에 고갱이 인간의 열정처럼 힘차고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의 그림은 불가사의하고 이국적인 주제들로 가득하다. 그는 타이티 섬 원주민의 정신 속에 들어가 그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려했다. 


폴 고갱 [탄생]


원주민의 장인들의 수법을 연구했던 것일까? 때로는 그의 그림 속에 원주민의 작품을 묘사한 흔적들도 간간히 보인다. 그가 묘사한 원주민들의 초상을 그러한 '미개한' 미술과 조화시키고자 애쓴 흔적을...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형태의 윤곽이 단순화되어 있고, 색채의 넓은 색면(色)은 강렬하고 거침없어 보인다. 단순화된 형태와 색채가 전체적인 작품을 평면적으로 보이게 하지 않을까 하는 점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폴 고갱 [브르타뉴의 시골 여인들]


고갱은 그가 본 인생과 예술 전부에 대해 불만을 느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보다 단순하고 보다 솔직한 어떤 것을 열망했고, 이것을 미개인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희망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들라크르와 [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가 보다 강렬한 색채와 자유분방한 삶을 찾아 알제리로 갔던 것처럼, 고갱 또한 자신이 동경했던 강렬함과 단순함을 위해 타이티 섬으로 갔던 것이리라...


가장 인상적인 붉은 색 벽의 전시실들


이렇듯 일종의 본능에 이끌려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가슴은 기쁨과 불안이 뒤섞여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전시실 18에서 21까지의 작품과 화가들을 제각기 다른 것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그것을 모두 합칠 때, 하나의 작품이 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다 보면 이들의 숨겨진 또 다른 '빛'을 차츰차츰 짐작하게 되지 않을까?


어느새 마지막을 직감하게 되는 전시실 22로 발길을 옮겼다. 저 너머에 있는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새로움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지극히 정적이면서 동시에 역동적인 이미지를 표현한 클림트[Gustav Klimt]의 여인은, 금방이라도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향기를 내뿜기라도 할 것처럼, 액자 밖으로 걸어 나올 듯했다. 아름답고 섬세한 선, 탐스러운 하얀 피부, 장엄하면서 비장함이 감도는 느긋한 표정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대표하듯, 고혹적인 자태로 관람자들의 마지막 행로인 전시실 22에서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좌 : 전시실 22에서 바라본 클림트 [마르가레트 스톤보로 - 비트겐슈타인의 초상] / 우: 프란츠 폰 슈투크 [죄악]
구스타브 클림트 [음악] / [[마르가레트 스톤보로 - 비트겐슈타인의 초상] 부분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 황금빛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구스타브 클림트를 동경하지 않았을까? 클림트의 여인은 유채색 팔레트에 한 방울 떨어뜨린 검정 물감처럼, 마치 물처럼 형태를 바꾸듯 현실과는 부합되지 않는 듯 보였다. 나는 꿈속에서 자신을 잊은 채 자유롭게 떠다니는 그녀의 시선을 포착하기 위해 몇 번이고 그녀의 시선을 쫒았다. 하지만 보는 이의 시선을 무색하게 만드는 그녀의 시선은 방향을 바꾸지 않은 채로 나와 나의 친구를 그 유일하고 완전한 축복으로부터 내몰아, 저 너머에 있는 낯선 풍경 속으로 인도했다. 그렇지만 우아하고 매혹적인 얼굴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시선에서 보이는 생각은 악의라곤 전혀 없었던 것이다.


좌 : 카미유 클로델 [왈츠] / 우 : 베르텔 토르발센 [사과를 손에 든 비너스]




그제야 나는 비로소 그 은밀한 사상이 주는 마력에서 겨우 벗어났다. 하지만 내 가슴은 오랫동안 불 위에 올려진 물이 처음에는 가만히 있었지만 갑자기 끓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넘쳐흐르는 것처럼,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렇듯 예술적 낙원은 행복에 대한 약속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의 마음속은 가을 하늘처럼 맑았고, 오랑캐꽃 향기처럼 신선했다. 자신의 감정적 동요를 즐겁게 체험하는 것이야 말로 무수한 속세의 소음을 차단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순수하고 고요한 순간이지 않을까? 


노이에 피나코테크 전시실 복도 [Corridor in Neue Pinakothek]


그리고 천천히 고요하고 장엄하게 일상의 문을 두드렸다. 맑고 투명한 하늘은, 발치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피어 있는 들판의 들국화가 지닌 그런 아름다움에 대해 눈뜨게 해주었고, 풀잎에 맺힌 한 방울의 이슬이 금반지에 박힌 수정도다 더 아름답게 게 해 주었다. 위대하다는 것을 단번에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위대함을 찬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이며, 결국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찬탄한다는 것, 그것은 내가 배워야 할 또 하나의 예술인 것이다. 첫눈에 마음에 든 것은 이상스럽게도 오래도록 지속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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