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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SJ Apr 20. 2019

론다의 어느 타파스바에서

이곳에서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



어느 덧 스페인에서 어학연수를 시작한지 11개월차가 되었다. 1년이 꽤 긴 시간으로만 생각되었는데 벌써 11개월이라니!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에 허탈함을 느끼며, 아직도 더듬더듬 거리는 나의 부족한 스페인어 실력에 답답함을 느끼며, 또 한 살 늘어난 내 나이와 불안정한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며, 그렇게 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런 마이너스 적인 감정때문에 오늘 하루를 소홀하게 보내지는 말자!'고 마음 속으로 툭하면 다짐을 굳히면서 말이다.


확실히 2019년에 들어오면서 작년에는 별로 느끼지 않던 불안감을 많이 느끼게 됐다. 사실 나이를 한 살 먹은 것은 숫자가 하나 늘어난 것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20대와 30대의 '한 살 더 먹음'은 분명히 느껴지는 차이가 크다. 그것도 이제 '아직 30대 초반이니깐'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나이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감정기폭은 더 심해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유럽의 나이 세는 시스템이 더더욱 마음에 들고 있다. 여기서는 아직 30대 초반이거든)







의도적이든 아니든 그 11개월동안 얼추 매월 한 번씩은 여행을 다녀왔다. 사실 자금적으로, 그보다 정신적으로 더 여유가 있었다면 매월 두 번은 가고싶었을 '여행'이지만 나 스스로에게 '여행은 매월 1번만. 근교 도시 정도라면 2번까지도 오케이'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러한 최소한의 제한 없이 그저 여행의 매력에 풍덩 빠져있다가는 내 통장잔고가 언제 바닥을 드러낼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매월 여행을 떠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어느 한 두번은 여행을 떠나지 않은 달이 있었다. -순전히 그 전달에 너무 돈을 써서, 돈을 덜 쓰기 위해- 그런데 이 여행을 내 일상에서 빼고 나면 나의 24시간은 꽤 단조롭게 흘러간다. 서울에서의 내 생활이 집-회사를 반복했던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는 학원-도서관-집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없고, 미세먼지까지 없는 풍족한 환경에 놓여 있지만, 그럼에도 이런 반복적인 일상만 지속하다 보면 나의 마음과 정신은 어쩐지 피폐해져가는 것만 같고 내 마음 속에서 용암처럼 늘 들끓는 마이너스적인 생각은 곧 터질 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해서 나는 여행을 가고 있노라고, 당당한 변명을 외쳐본다.







그런 올해의 첫 여행지는 '안달루시아' 스페인 남부였다. 지난 겨울 라이언에어 저가항공에서 발렌시아-세비야 왕복 항공권이 20유로 정도의 가격에 떠서 안 끊을 수가 없었다. 세비야는 이미 한 번 가본 곳이었던지라 아직 못 가본 론다를 끼기로 했고, 론다를 끼는 김에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한 곳인 옆동네 '까미니토 델 레이(Caminito del Rey)'도 같이 하기로 했다.


여행은 좋았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아마 혼자였으면 다소 론다 첫 날의 날씨처럼 쓸쓸 쌀쌀했을 것 같은데, 나의 꼬드김에 바로 홀랑 넘어온 친구 M과 함께여서 내 여행은 무척이나 즐거워졌다.








특히 우리의 흥은 우연히 들어간 이 타파스바에서 정점을 찍었다. 둘 다 사람 번잡한 곳은 썩 좋아하지 않는 터라 누에보다리(Puente Nuevo)는 잠시 들러 뷰만 감상하고 론다의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바깥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조금만 길을 벗어나니 시골에서만 맡아지던 쿰쿰한 냄새가 슬쩍 들어간 공기 냄새와 온갖 동물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길을 한참 걸으니 우리는 이 작은 도시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 꽤 지났던 터라 길가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타파스바를 무작정 들어갔다. 당시 그녀는 스페인 어학연수 11개월 차, 나는 8개월 차로 우리는 '기본적인 스페인어 정도는 이제 두려움 없지!'라는 모드였으니 이런 관광객이 1도 없을 것 같은 타파스바에서도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하며 말이다. 언어적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가 있을 것이라곤 이 때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Hola"


작은 종이 달린 문에서는 짤랑이는 소리가 났고, 우리는 그 작은 타파스바에 발을 들였다. 1초의 정적의 순간. 바에 앉은 손님들은 동공이 확장된 채 일제히 우리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정적의 1초가 끝나자 가게는 엄청 소란스러워졌다.


"Hola~ Buenas~!!" "Hola~ Que tal~!?"


타파스집의 사장님과 직원은 물론, 몇 안 되는 자리를 메우고 있던 단골 손님들은 이 곳에 올리 없는 동양인 여자애 두 명의 방문이 무척이나 신기하고 즐거운 듯 했다. 우리가 스페인어로 짧게 대답을 하면 그 동그란 눈이 다시 한 번 커졌고, 목소리는 그 못지 않게 더욱 커졌다.







와인과 타파스 두어개를 주문하니 금방 금방 음식이 나왔다. 굶주린 우리는 사진 한 장만 급하게 찍고 음식을 입 안에 쑤셔 넣었다. 그 순간 우리의 눈은 그들의 눈보다 더 커졌다. 이윽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온갖 감탄사를 쏟아냈다. 처음 들어보는 언어-한국어-에 주인장과 손님들은 우리 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그렇다. 우리가 배고프기도 했지만 그걸 떠나 이 집 타파스는 정말이지.....와인은 정말이지.....끝내줬다. 음식이 중간에 끊기면 안 된다며 우리는 와인을 한 잔씩 더 시키고 타파스도 두 개 더 시켰다. 그제서야 주인장은 "어디서 왔냐"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고 우리는 언제나처럼 당당하게 외쳤다. "Corea del Sur!(남한!)"-그냥 꼬레아만 얘기하면 꼭 그 뒤에 남한인지 북한인지를 묻는다. 다들 북한 사람은 유럽에서 본 적도 없으면서!!-








분하다. 글을 쓰는 지금은 오후 3시 50분. 점심으로 비빔밥을 잘 차려먹고 후식으로 오렌지까지 먹었는데 이 글을 쓰고, 이 사진들을 보니 그 때의 그 황홀한 식감이 다시 떠오르면서 위장을 마구 자극한다. 어찌 나의 위장은 이렇게 단순하단 말인가.







아무튼 우리는 그 두 번째 와인잔이 끝나기 전, 결국 타파스를 더 시키고 와인을 아예 한 병을 더 시켰다. "그래. 우리잖아. 우린 처음부터 와인 한 병을 시켰어야 했어" 사실 이 집에서는 정말 가볍게 주린 배만 달래주고 집 근처에 가서 론다 야경을 보고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와인 한 병을 시키니, 주인장 호르헤는 추가 와인 한 병을 서비스라며 가져다 주었다. 세상에 맙소사 오 마이 갓.


대체 이 꿀떡꿀떡 맛있게 넘어가는 와인의 정체가 뭔가 했더니 이 집에서 만드는 로컬 와인이라고 한다. 그럼 그렇지! 평소에 사 마시는 4-5유로짜리 병 와인이랑 다르다 싶었지!


그렇게 우리는 각 와인 1병, 플러스 두 잔의 와인을 비워냈고 와인과 함께 나의 정신도 흘려보냈다. 물론 론다의 야경을 보겠다는 일정은 우리가 병 와인을 시키는 순간부터 이미 불가능해진 것이었고, 다음 날 오전에 와이너리를 가겠다는 것도 물건너간 터였다.


하지만 너무나 맛있었던, 너무나 즐거웠던 론다의 첫 날 밤에, 다시 한 번 Sal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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