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히도 대비됐던 우리의 하루
오전 일찍부터 집 근처 초등학교에서 심리결과 해석수업을 진행했다.
반 아이들과 내 케미가 좋아서 두 시간이 훌쩍 갔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려는데 한 업체 담당 연구원님이 날 붙잡고 명함을 주셨다.
“강의를 교실 밖에서 계속 들었는데,
강의를 너무 잘하셔서 중간 에이전시끼지 않고 저희가 직접 고용하고 싶어요”
뛸 듯 기뻤다.
에이전시를 끼지 않는다면 기존 강의보다 2배~3배의 시간당 비용을 벌 수 있었다.
명함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카페로 출근했다.
요즘은 커피를 배우고 있는 선생님의 카페로 출근해 실무를 배우고 있다.
주문이 밀렸을 때 어떻게 음료를 제조해야 하는지,
재료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미리 만들어 놓는 베이스의 비율은 어떻게 되는지 등
굉장히 디테일한 부분을 배우고 있다.
배운 것들을 내 카페에 어떻게 녹여낼지 생각하면서 마냥 재밌고 즐겁게 일을 배웠다.
바쁜 시간대가 끝난 오후 3시, 카페에서 설거지를 하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친한 친구가 동기들 몇몇에게 보낸 단체 카톡이었다.
“얘들아 염치없지만 엄마가 오늘내일하셔.
장례를 치르게 되면 와서 기도 한번 해줘. 미안해 이렇게 부탁해서”
당황스러웠다. 아프셨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갑자기 어떤 사고가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날 낮 친구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를 포함한 대학동기 3명은 부랴부랴 우리 집에 모여 내 차를 타고 춘천으로 향했다.
춘천으로 향하는 길,
우리는 매번 모일 때마다 하는 대학시절의 웃긴 추억 얘기들을 하며
애써 무거움과 슬픔을 덮었다.
왁자지껄한 웃음 속에서 흡사 여행을 떠나는 분위기의 차 안이었지만,
서로 만나기 전까지 어찌나 울었던지 각자 빨갛고 부어오른 눈은 감 출 수 없었다.
익숙한 친구끼리 익숙하게 실없는 대화를 나눴지만,
분명 어딘가 다른 분위기였다.
그 분위기의 실체는 저녁 9시쯤 장례식장에 거의 도착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두려웠던 것이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차를 세우자 한 친구가 말했다
“아, 들어가기 싫다”
우리는 며칠 동안 맘 고생한 친구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우리를 보고 애써 웃음 지을 친구의 초췌한 얼굴을 보면 왈칵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늘 만나면 코믹 시트콤을 찍는 동기들인데,
처음 겪는 친구의 친모상 상황에서는 어떤 모습의 서로를 발견하게 될지 몰랐다.
차에 내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친구 모친의 장례식장은 2층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바로 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울면서 복도를 가로질러 친구에게 달려갔다.
우리 셋을 안고 친구는 낮은 소리로 흐느꼈다.
우리가 오기 전에 얼마나 울었으면 울 힘도 없을까 싶어 마음이 아렸다.
친구와 친구 어머니께 예를 갖춘다는 마음은 굴뚝이었지만,
우리는 장례식 예절에는 서툴렀다.
조문할 때 국화는 어느 방향으로 올려야 하는지,
향은 어떻게 피워야 하는지,
둘 다 해야 하는 건지 서로 몰라 우물쭈물 댔다.
친구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하나씩 알려줬고
우리는 그대로 따라 하며 가까스로 예를 갖출 수 있었다.
식사하는 장소로 이동해 자리를 잡았다. 때마침 조문객이 없었기에 친구는 우리 테이블에 앉으며
“너네 보니까 좋다”라며 웃음 지었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 마냥 슬펐는데, 우리를 보니 좋다고 말하는 친구를 보고
우리 셋은 암묵적으로 다짐했다.
‘오늘 우리는 그다지 진지하지 않겠노라’
완급조절은 있었지만 우리는 어렵게 가벼운 텐션을 유지했다.
남자친구들 얘기도 하고, 친구의 친구들 얘기도 하면서.
가끔 삐져나오는 슬픔은 감출 수 없어서 눈물을 훔치다가도
틈틈이 우리 자리로 친구가 오면 다시 실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는 조문객을 맞이하느라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다.
검은색 상복을 입은 친구의 뒷모습이 왠지 커 보였다.
한번 크게 울어내고 장례식장에서 반듯하게 서서 조문객을 맞이하는 친구는 어른이었다.
가장 큰 존재의 상실이 어떤 고통을 동반할지는 감히 내가 상상할 수 없었다.
그 고통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고 문득 찾아와 친구를 아프게 할 것이다.
나는 친구의 커다란 뒷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그 아픔을 잘 이겨내 주길 진심으로 바랐다.
어느덧 시간은 저녁 11시가 넘었고 친구는 내 손을 잡고 애들을 태우고 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너는 같은 상황이면 안 그럴 거냐고,
그리고 연락을 줄 때 왜 염치없고,
미안해하냐고 서운하다고.
연락을 받고 내내 그 말이 신경 쓰였다.
3일 내내 밤새 옆에 있어 줄 수 있는데,
미안하고 염치없지만 장례식장에 와 줄 수 있냐는 연락을 받으면 찜찜하다.
친구도 이런 상황이 처음인지라 어떻게 연락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내가 서운함을 표현하자 친구는 미안하고 고마운 표정을 내비쳤고 나는 그걸로 충분했다.
함께 장례식장에 간 동기들을 각자 의정부와 신림에 살았다.
시간이 많이 늦어 각자 집에 태워다 주고 집으로 혼자 돌아오는 길,
시간은 새벽 2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혼자 새벽에 운전을 하자니 생각이 복잡했다.
친구 어머니는 급성백혈병으로 출혈이 멈추지 않아 돌아가셨다.
잇몸에서 피가 나는 걸 삼일 동안 참으셨다고.
결국 병원에 의식이 없는 채로 병원에 실려오셨고,
친구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도 듣지 못한 채 보내드려야 했다.
친구는 밥을 먹는 내내 씁쓸한 얼굴로 “있을 때 잘해드려”라는 말을 했다.
불안함이 밀려왔다.
어느덧 친구 모친상을 겪을 나이가 됐구나,
우리 부모님 건강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늘 안 좋으셨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나는 버텨낼 수 있을까.
언젠간 맞이하게 될 그 상황에서 오늘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어른스럽게 행동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고 나는 내일모레 서른을 앞두고도 아직 어른이 덜 됐구나 싶었다.
씁쓸하게 새벽 운전을 하고 집에 오니 새벽 2시 30분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코코가 나를 반겼고,
조금 피곤한 것 빼고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오전에 받은 연구원님의 명함도 책상에 있었다.
오늘 하루가 참 지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