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수업은 초중고딩만 필요한 게 아니다
나는 약 2년째, 전국에 있는 초중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진로강의를 하고 있다. 매번 다른 학교에 다른 주제로 강의를 가는 다소 고된 일이지만, 수업때 만나는 아이들을 관찰하는 묘한 재미가 있기에 이 일을 즐기고 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가끔 뒷통수가 얼얼해질정도의 순수함을 보여주고, 중학교 아이들은 넘쳐나는 에너지와 학습된 절제의 중간에서 가장 좋은 수업 분위기를 유지해주며, 고등학교 아이들은 마치 세상을 통달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물론 학교마다 학생마다 다른 면이 있지만, 내가 지금까지 본 나이대별 데이터는 이러하다.
7월의 한 일요일, 나는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 수업을 다녀왔다. 내가 간 학교는 방송고등학교로 평일에 열심히 일하시던 부모님뻘의 어르신들이 주말에 공부를 하기 위해 모이는 곳이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진로강의를 한 것은 내 인생 처음이었다.
이 날의 수업은 자신의 성격유형(마치MBTI같은 것)을 검사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수업이었다.
'검사실시+해석'의 간단한 형식. 그러나 나는 매 수업을 꽤나 열심히 준비하는 편이다.
나의 수업스타일은 단순히 검사를 해석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검사결과를 실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할 수 있게끔 여러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다. 그래서 수업 준비과정에서 강의 교안을 분석하고 다듬는 과정이 끝나면, 아이들에게 할 질문들을 생각하느라 많은 시간을 쏟게 된다.
이번 수업도 마찬가지로 교안을 다듬고 학생들에게 할 질문거리를 생각했다. 그간 나름의 짬빱(?)이 쌓여서 초중고등학생들에게는 어떤 질문을 해야 반응이 좋고, 그들의 이야기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 대략 안다.
하지만 시니어는 차원이 달랐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학생들과 나이대가 전혀 다르고, 삶의 경험이 전혀 다르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미래와 꿈에 대해 어떻게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머리가 아팠다. 후회했다.
'내가 왜 이 수업을 하겠다고 했을까' '부산까지 왔는데, 그래도 잘 하고싶은데' '하 근데 뭔 얘기를 해야하지'
장소가 부산인지라 여행 겸사겸사 다녀오려했지만,
여행은 개뿔. 수업 전 날까지 호텔에서 밤 늦게 수업을 준비하다가 잠들었다.
대망의 수업 날.
떨리는 마음으로 강의실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출석률이 좋지는 않았다. 이날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던 날이어서 대충 예상은 했었다.
그 엄청난 폭우를 뚫고 출석한 어르신들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마구 솟구쳤다.
먼저 컴퓨터를 이용해 성격유형검사를 실시했다.
사전에 회사의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미리 검사를 해봤기에 이 과정은 그다지 어려운게 아니..
지 아니었다...
컴퓨터를 어떻게 켜는지 모르시는 어르신, 방송고 아이디,비밀번호를 자녀가 관리하는 어르신 등 검사 시작 페이지를 켜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다른 방송고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우여곡절끝에 검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성격유형검사를 해본 이들은 알겠지만, 어떤 성격유형검사든 상당히 많은 글자를 읽고 답변을 해야 한다. 체감상 이날 실시한 검사는 다른 검사에 비해 더 많았다. 대략 200문항쯤의 문제를 읽는 것도 답변해야 한다. 어르신들은 상당히 신중하게 문항을 읽어가셨고 답변에도 상당히 신중하셨다...
총 100분의 수업시간에서 검사실시에 20분내외를 예상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완벽한 오판이었다. 오직 검사 실시에만 한시간이 넘게 걸렸다.
성격유형검사결과는 바로 나왔다. 어르신들은 자신들의 성격을 그동안 정확히 진단해 본적이 없었는지, 마치 재밌는 것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를 하고 결과를 읽어나갔다. 시선을 살짝 돌리자 마치 계약서를 검토하는 것처럼 진지한 얼굴로 결과지를 훑어가는 어르신도 보였다.
그 모습들을 보고, 지금 우리는 이름,나이,직업,mbti가 기본 신상정보가 되어 있는데 반해, 시니어들은 자신의 성격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여유가 없었겠구나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일에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계시는지 그들의 거칠고 그을린 피부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런 이들이배움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매주 고등학교에서 수업을 듣는다. '그 열정은 어떤 것일까' '내가 가져본 적이 있는 열정일까' '그 배움의 목적은 무엇일까' 속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검사결과지를 다 훑고 본격적인 강의에 들어갔다. 일상적인 사례와 간단한 게임 등을 섞어 해석강의를 진행했다. 분위기는 좋았다. 어르신들 특유의 유쾌함과 호탕함과 아재개그틱함이 섞여 나도 재밌게 수업했다.
그런데 한 밸런스게임 질문이 나오자 심각해지는 얼굴들을 발견했다.
'연봉 100억, 날 무시하는 배우자 vs 연봉없음, 날 떠받들어주는 배우자'
가볍게 준비한 밸런스 게임인데, 그들에게는 가볍지 않았나보다... 이 질문이 화면에 뜨자 다들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아차 싶었다. 중고등학생들의 경우 당연히 저런 경험이 없을테니 상상에 의존해 대답할 것이지만, 어르신들은 달랐다. 저 질문과 관련된 다양한 경험이...있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 후다닥 넘어갔다.
다음은 각자 나온 성격강점을 바탕으로 그것을 살려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이 역시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어르신의 답변을 듣고 '현재에 온 에너지를 쏟아온 이들이 미래를 상상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어떤 분의 성격 강점은 '배려심'이 나왔다. 그 강점을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해본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했다. 그분의 대답 "지금껏 딸들 키우느라 바빴지 미래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대신 나는 배려심을 바탕으로 딸들과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순간 당황해 머리가 띵했다. 적당한 리액션을 찾지 못한 채 다음으로 발표를 이어갔고, 그렇게 어찌어찌 수업이 종료됐다.
이번 시니어 진로수업은 그간 진행했던 진로수업과 차원이 다른 예상밖 상황을 마주하며 내게 아주 특별한 교훈을 남겼다.
1. 진로라는 것은 자신의 미래 길이라고 생각해서 스스로의 내면에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방향이 자식을 향할 수도 있다는 점
2. 어르신들의 진로방향은 어쩌면 초중고등학생들과 차원이 다른 방향으로 다양할 수 있을 거라는 점.
3. 강한 배움의 열망으로 이곳을 찾아온 이들과 함께 제 2의 삶에 대한 의지와 꿈을 반드시 함께 이야기 해보고 싶다는 점
누구나 늙는다. 누구나 시니어가 된다.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러하다. 그런데 우리는 시니어와 소통하는 법을 모른다. 말하고자하는 시니어는 많지만 듣고자하는 청년은 별로 없다. 이러한 현상이 우리가 시니어층이 되었을 때 외로움과 고독을 되물림한다.
이번 수업을 계기로 나는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됐다.
우선, 진로강사로서 삶의 경험이 나보다 훨씬 풍부한 어르신들에게 미래에 대해 어떻게 말씀을 드릴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의 초중고 짬을 잠시 넣어두어야 한다. 강의 주체의 강점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초중고등학생은 나이가 곧 무기이지만, 시니어는 삶의 경험 그 자체가 무기이다. 그 무기를 바탕으로 어떻게 미래의 삶을 그려나가야 할지, 어떤 제2의 삶을 꿈 꿀 수 있을지 생각하고 이야기해보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진로강사로서 앞으로 나는 시니어의 꿈을 응원하고 키우고, 의지를 북돋아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싶다.
또한, 내가 시니어가 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시니어도 꿈꾸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다. 노년의 로맨스, 노년의 패션센스, 노년의 힙한 커뮤니티 형성에 일조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주 커졌다. 나이드는 것이 두려운 일이 아닌, 즐거운 일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