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오픈이 내게 단비 같은 존재인 이유
내 안의 불꽃이 살아나고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내 것에 대한 의지와 열정, 책임감은 비로소 나를 존재하게 만든다.
어제 늦은 시간까지 혼자 카페에서 남아서 카페 오픈 준비를 했다. 목표했던 날짜가 있었지만, 그 안에 오픈이 벅찰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정신없이 메뉴판 작업을 하다가 문득 그래도 머신이나 카페 청소는 하고 작업해야겠다 싶어서 마감 작업에 들어갔다. 머신들을 정리하고, 작업대를 닦고, 쌓여있는 컵들을 설거지하는데
문득, 행복했다. ‘그래, 나 원래 일로 행복해지는 사람이었지’
내 직업 가치관에서 워라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는 목적지향적인 사람이고 목표한 바를 달성하기 위해서 내게 주어진 24시간을 통째로 할애할 수 있다. 그런 내가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하면서 내 의지대로 일 할 수 없게 되었고, 나는 삶의 의욕을 잃어갔다. 지금 준비하는 자그마한 테이크아웃 카페는 그 와중에 시작한 삶의 지푸라기 같은 존재다.
카페라는 일은 쉬워 보이지만 할 일도 산더미고 무엇 하나 쉬운 일은 없다. 더군다나 본사에서 모든 교육을 진행하는 프랜차이즈가 아닌 개인 카페로 오픈한다는 것, 카페 알바도 한 번 해본 적 없다는 것, 커피보단 술을 즐겨 마셨던 내 취향, 이런 것들이 한 데 모여 첩첩이 산중을 만들어냈다. 까마득했다. 0부터 10까지 모든 것을 배우고 진행해야 했고, 숱한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보통 같으면 이쯤 되면 포기의 단계에 들어섰을 텐데 전혀 그러고 싶지 않다.
지금 이 카페는 무엇하나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내 것’에 대한 무한 책임감이 생긴다. 그 책임감은 의욕과 에너지를 끌어올린다. 회사를 다닐 때는 남의 일을 한다는 무의식이 있었기에 어떤 일을 해도 재미가 없었다. 자연스레 의욕도 생기지 않아 생산성이 영 나빴다. 업무 생산성과 효율이 낮은 직원에게 회사도 고운 시선을 보낼 리 없었고 매일 회사도 나도 고역인 상황이 반복되었다. 반면 지금은 잘 돼도 망해도 내가 벌여놓은 '내 일'이다. 회사에서는 미처 배울 수 없었던 역대급 책임감을 배우고 있다. 하루하루 책임감을 발판 삼아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일로써 성장하는 것'은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직업가치관이다. 이 카페는 내가 가진 모든 지식과 재능을 일하게 한다. 경영학도로서 배웠던 경영, 마케팅 지식들이 총동원되기도 하며, 일러스트로 메뉴판, 간판, 전단지 작업 등을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내가 중국, 캐나다 등에서 보고 겪어서 좋았던 취향들이 반영된다. 카페 오픈을 한다면 지금 운영하고 있는 독서모임의 경기도 광주 버전도 만들려 한다. 언어, 역사 등 원데이클래스 진행도 염두에 두고 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요즘, 즐거운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에 임하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행복하다. 밤에 눈을 감기 전에 내일 할 일이 있다는 생각에 빠져 잠드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얼마 전 읽은 책 칼릴 지브란의 <이방인>에서는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대 만일 괴로운 나머지 태어남을 고통이라고 하고 육체를 먹여 살리는 일을 자신의 이마에 써진 저주라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오직 그대 이마에 흐르는 땀만이 그곳에 씌어 있는 저주를 씻어 줄 것이라고.”
배우라는 일은 참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노력의 더함과 덜함의 문제도 아니고, 실력의 출중과 부족함의 문제도 아니다.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불안을 다스리는 능력과 기다림의 자세다. 일에 늘 목말라 있는 내게 너무 가혹한 직업임은 틀림없다.
이 카페는 내 이마에 땀을 흐르게 한다. 내가 빠져들었던 고통의 늪에서 단비 같은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