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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화경 Nov 14. 2019

끝나지 않은 여행 3

- 사십춘기에 떠난 여행 -

  눈을 떴을 때, 보통은 벌떡 일어나지만 이번 아침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서 뒹굴뒹굴, 한참을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전날 사놓은 컵밥을 먹고는 천천히 길을 나섰다. 하늘도 무심하지. 38년 만에 혼자 떠나는 첫 여행인데 어제도 비를 내리시더니 오늘까지 내려주신다. ‘그래, 나는 비 오는 날 가서 나만의 특별한 풍경을 보고 오리라.’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양떼목장 주차장에는 차들이 꽤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 우산만으로 비를 막기에는 부족했다. 곧장 우의 파는 곳으로 가서 줄을 섰다. 우산을 쓰고 우의까지 입었는데도  발목부터 종아리까지 비에 젖었다. 찝찝한 기분으로 언덕을 올랐다. 이게 아닌데. 사실은 드넓은 들판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양을 보고 싶었는데. 아침의 다짐은 사라지고 불평과 쓸쓸함만이 마음속을 뛰어다녔다. 


  10분 정도 올라가니 울타리에 몇 마리의 양들과 젖소들이 있었다. 재밌게도 젖소들의 이름은 예진, 효리, 연아, 중기였다. 양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크고 순한 소의 눈과는 다르게, 양의 눈은 솔직히 말하자면 무서웠다. 어디를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눈이었다. 내 시선도 그와 같았다. 이 여행을 떠나오기 전, 내 마음의 눈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길을 따라 양몰이 공연장으로 갔다. 비가 많이 오니 공연을 못 보더라도 아쉬워 말자고 생각했다. 비를 맞고 공연하는 양떼를 보면 더 슬플 것 같았다. 비가 잦아들어 양몰이 공연은 시작되었다. 곧 빗줄기가 다시 굵어졌지만 공연은 계속 이어졌다.  


  양떼 몰이꾼의 휘슬소리가 빗속을 가로질러 울리자 두 마리의 양치기 개들이 양에게로 향했다. 양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양치기 개가 몰아가는대로 움직였다. 스무 마리가 넘는 양들은 언제나 그랬다는 듯 장애물을 쉽게 넘었다. 비가 오는데도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양과 양치기 개. 나 또한 인생의 맑은 날과 비 오는 날,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12년 동안 아이의 엄마였을 뿐, 독립된 여성으로서의 나는 없었다고 생각했던 시간들. 그것도 내 삶의 일부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양몰이 공연은 마치 내 삶을 위로해주는 한편의 연극인 듯했다.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주는 먹이를 먹으러 양떼가 모여들었다. 내게는 위로가 되는 공연이었지만, 비를 맞은 양과 양치기 개에게는 미안했다. 그들의 수고가 잊혀지지 않게, 순간을 가슴에 담았다. 


  양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걸었다. 양떼목장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산은 마냥 안개로 뒤덮인 것으로만 보였다. 반면 내려올 때는 비로 인해 추워하는 나무를 안개가 안아주는 것 같았다. 흐르는 계곡물 소리. 내 마음의 응어리가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마음에 한 폭의 그림을 그렸다. 안개가 자욱하니 수묵화가 좋겠다. 숲내음, 개울물 소리, 손에 닿는 빗방울. 이 부분은 수채화가 어울린다. 마음으로 그린 것은 실제 보이는 것보다 더 아름답다. 언제든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낼 수 있는 그림이다. 다만 나만 볼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더 아름답기도 하지만 말이다.  


  산길을 따라 내려와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창문 밖으로 보이는 구름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의 모습들이 한 컷, 한 컷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힘겨운 순간,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었지만 분명 행복한 순간,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순간도 있었다. 그 모든 순간은 나를 만들어주는 시간이었다. 여행에서 다하지 못한 생각들. 내 삶을 돌아보며 내안의 나를 찾는 여정이 아직 남아 있다. 나의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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