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어 그저 최선을 다할 뿐 바다에서도 삶에서도
여름의 시작이다. 예보되어 있는 긴 비를 통로 삼아 본격적인 여름을 위해 봄이 자리를 내어줄 모양이다. 여름을 시작하는 사진들로 온 SNS가 떠들썩할 때, 유난히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어느 깊은 밤, 이런저런 생각들이 쉽게 가라앉지 않아 무작정 밤바다로 달려가 몸을 띄웠다. 아직은 차가운 바닷물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했다. 내가 만든 물의 파동이 잔잔해지고 귀 옆을 찰랑이는 물소리가 사라졌을 때,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순간이 만들어진다. 조용히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검은 하늘과 검은 바다의 경계가 지워지고 둘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 온다. 멀리 떠 있는 별이 지구고 내가 별이 된 기분으로 검은 우주를 유영한다. 한참을 수면과 함께 흔들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자크'와 '엔조'는 그리스의 작은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다. 자크는 어린 시절 혼자가 되어 바다와 돌고래를 가족으로 삼고 외롭게 성장한다. 엔조는 자크와 함께 자라며 우정을 다지는 유일한 친구였다. 시간이 흘러 엔조는 프리다이빙 세계 챔피언이 되고 아무도 그의 자리를 넘볼 수 없다고 말할 때, 엔조는 자크를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다이빙 대회에 초대한다. 아름다운 바다 시칠리아에서 다시 재회하게 된 두 사람. 대회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자크는 '조안나'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랑블루>는 1988년에 프랑스에서 개봉되어 한국에서는 1993년에 개봉한 만 35년이 된 영화다. 영화 속에는 제작 당시 문화 전반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어 영화 곳곳에서 보기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당시의 성별, 인종에 대한 인식과 문화, 의학 상식 등이 현재와 꽤 차이가 나 이에 대한 차이들도 함께 비교해 보면 좋겠다. 예술에서 메시지 없는 불쾌함은 없다고 생각한다. 너른 마음으로 지나간 35년이라는 세월이 참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켜보자. 그 시간 속에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도 함께.
바다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좋은 영화는 셀 수 없이 많다. 그 사이에서도 <그랑블루>는 수많은 영화 팬들이 입을 모아 인생 영화로 뽑는다. 그에 반해 바다만 주야장천 나오는 이 영화가 무슨 재미가 있냐며 재개봉 당시 우스갯소리로 '보지 마세요! 세 시간이나 상영합니다!'라는 문구가 합성된 포스터가 밈이 되어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여름이 되면 이 영화가 여전히 회자되는 데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자크는 자신의 안식처인 바다와 돌고래에게, 엔조는 바닷속 깊은 곳에, 조안나는 자크를 향한 사랑에 최선을 다한다. 시칠리아에 모인 셋은 그저 자기 앞에 놓인 자신들의 생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것이 결코 이별, 상실, 죽음일지라도.
뤼크 베송 감독의 <레옹>이 흥행하기 전 제작된 이 영화는 <레옹> 덕분에 다시 화제가 되어 숨겨진 수작으로 인정받았다. 개봉 연도가 꽤 오래되어 아직 접해보지 못한 독자를 위해 이달의 영화로 소개한다. 한여름 밤의 수영이 이 글을 쓰는 데 좋은 방아쇠가 됐다. 덕분에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아름다웠던 기억이 샘솟았고 독자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우리는 삶을 살며 많은 것에 가로막히고 휩쓸리고 걸려 넘어지지만 자크와 엔조, 조안나처럼 자신만을 위해 살아보는 것도 분명히 멋진 일일 것이다.
오늘도 책상에 앉아 해결해야 할 일들은 잠시 뒤로 미루고 수영가방을 챙긴다. 오늘은 어떤 파도가 나에게 멋진 착상을 가져다줄지 기대하며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산문시 '바다'의 한 대목을 소개하며 이 여름의 뚜껑을 닫으러 나서야겠다
"바다는 밤에 침묵하지 않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불안한 삶 속에서도 잠을 잘 수 있게 하는 허락이면서, 그렇다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약속의 매력 말이다. 마치 아이의 방의 야등이 빛날 때면 꼬마들이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