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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Oct 19. 2022

가을밤 작은 일탈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오랜만에 집 밖에 나왔다. 누가 나를 감금시킨 게 아니라 내가 나 스스로를 감금시킨 날들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해야 할 일을 두고 나가고 싶지가 않았다. 할 일을 끝낼 때까지 집안에 머물렀다. 당면한 가장 중요한 일이 내 선에서 일단락되자 감각들이 살아났다.


베란다를 가득 메운 오후의 긴 햇살이 따스했고 열어 둔 창에서 들어온 바람이 차가웠다. 그걸 알아차렸다. 하늘은 시리도록 파랬고 창밖에 내다보이는 나무들은 한창 색을 떨궈내고 있었다. 그게 보였다. 늘 감탄하게 하고 날 숨 쉬게 하던 그들이 손짓하고 있었다. 얼굴 봐라. 어쩐지 뜸하더라니 대번 티가 나네. 으이그.. 뭐하느라 이제 왔어? 이제라도 왔으니 됐다. 얼른 들어와. 만끽해야지. 그래야 제대로 사는 거지,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 인생 뭐 있나. 즐기며 살아야지. 가자! 가는 거야!

그래서 간 것이 밤 영화.

애걔? 겨우? 꼴랑?

언니들과 밤에 영화관에 가는 게 뭐 어때서? 누구에게는 별일 아닌 일이겠지만 내겐 일상을 깬 작은 일탈이었다. 한적한 영화관 로비에서 수제버거집 직원인 언니가 만들어 온 버거로 저녁을 먹고 짧지만 알찬 근황 토크를 하고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펼쳐진 영화.


원래 하던 대로 사전 정보 없이 봤다.

주연배우들의 현실감 있는 연기에 초반부터 푹 빠져서 보는데 염정아 배우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거다. 뭐지, 싶었던 건 찰나. 이문세의 '조조할인'에 맞춰 극장 앞에서 펼쳐지는 군무와 생동감 있는 화면에 완전 몰입해 버렸다.


웃고 발 구르고 손뼉 치고..

전부 아는 80, 90, 2000년대 명곡들이 나오는데 일어서서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주크박스 뮤지컬 영화. 새롭게 작곡한 곡이 아닌 익히 아는 노래로 진행되는 영화가 주크박스 뮤지컬 영화라고 한다. 마치 이 영화를 위해 노래 가사를 썼나 싶을 정도로 찰떡같이 들어맞는 상황과 가사의 조화로움에 놀랐다.


배우들이 노래는 또 왜 그렇게 잘하는지. 보다가 옆자리 언니에게 귓속말로 염정아가 직접 부른 거 맞아? 하고 묻기까지 했다. 전개가 뻔히 눈에 보였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딱 내 또래의 이야기라 연신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봤다. 웃느라고 눈물 훔치다가 자식들 등장 장면에서는 세 여인의 눈물보가 동시에 터지기도 했다. 아,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자식이 킬링 포인트구나, 싶었다.


운동회 때 단체 무용 장면을 연상시키는 대형을 만들며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을 보면서 묘하게 힐링이 됐다. 나의 파랗던 시절이 떠올라서였을 터다.  고증이 살짝 오래된 부분들이 있었지만 감안할 수 있었다. 대형을 만들며 심혈을 기울였을 것 같은 색감도 눈에 띄었다. 그런 부분이 맘에 들었다.


영화를 보면 나중에 기억에 남는 명장면이 있다. 내용적으로 중요한 부분도 있겠지만 주로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다. 메인 포스터에 자동차 선루프에 서서 두 팔을 활짝 펼친 장면이 압권이었다. 세 여인이 합창하듯 우와! 했으니까. 부럽고 아름답고 근사한 장면이었다.


영화 크레딧이 올라갔다. 크레딧 끝까지 보는 걸 선호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기에 혼자 갔을 때가 아니면 일행에 맞추는 편이다. 영화를 보고 할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한 언니가 막 입을 떼는데 스크린에서 '세월이 가면'이 흘러나왔다. 언니를 바라보는 내 눈엔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차 올랐다. 눈이 마주치자 언니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손으로 스탑을 외치고 침묵 속에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닦았다.


셋 다 눈이 뻘겋게 된 채 인사를 나누고 깔끔하게 헤어졌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감상들은 오래 남아 있었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한 코스 전에 내려 가을밤을 걷는 동안에도 내내 마음속을 맴돌았다. 내뱉지 않고 마음속을 떠다니도록 놓아두는 것도 좋았다. 그래서 여기 이곳에도 감상을 자세히 적지는 않았다. 그저 이 가을에 보기 좋을 영화로 넌지시 추천해 보는 것으로 맺음 한다.


가을 일렁임 photo by duduni


*대문사진 : 영화 스틸컷

*댓글에 답글이 늦어진 점, 이웃님들 방에 들르지 못한 점에 죄송함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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