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집에서였던가? 식탁에 놓인 작은 김치 항아리에서 김치를 집어 들고 그녀가 물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
김치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느냐니? 무슨 말이지?
할 말을 찾지 못해 벙찐 표정이 되었다.
좋아하는 부분 드리려고요. 저는 잎 부분 좋아해요.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그는 접시 하나에 줄기 부분 잎 부분을 따로 덜어놓으며 말을 흘렸다. 다른 이야기가 밀고 들어와 김치 이야기는 금세 묻혔다.
몇 번 만나본 그녀의 인상은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생각이 뚜렷하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없는 인상, 그래서 부럽기도 한 인상. 그런데 김치까지 명확한 취향이라니.
이젠 그녀의 얼굴도 목소리도 가물가물하다. 취향이 확실하다는 것만 남아 있다.
불확실한 취향.
이게 좋은지 저게 좋은지 모르겠다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과 저것을 다르게 구분하는 것 자체가 낯설다.
탕수육 부먹인지 찍먹인지,
콘프레이크에 우유를 붓는지 우유에 콘프레이크를 넣는지,
꼬들 라면인지 익은 라면인지,
신김치인지 새 김치인지,
거기다 김치 잎인지 줄기인지까지.
웃자고 하는 이야기일 줄 알았지만 한없이 진지하기도 하더라는 것. 불확실한 취향인으로서 이런 걸 나누는 의미를 모르겠다. 굳이 답을 하자면 '되는 대로, 그때 기분 따라, 맛있을 것 같은 쪽으로.'
탕수육이 바싹 튀겨져서 나오면 반 정도 부어서 먹다가 튀김의 숨이 죽고선 찍어먹으면 될 것.
우유든 콘프레이크든 손 가는 대로 그릇에 먼저 넣고 나서 뒤이어 다른 하나를 넣으면 될 것.
면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시간 조절하면 되고 누가 끓여주는 라면이면 주는 대로 먹을 것.
새 김치든 신김치든 김치가 생기면 감사해하고 음식에 맞게 꺼내 먹을 것.
거기다 김치는 잎이든 줄기든 집히는 대로 먹을 것.
결론은 취향 없이 잘 먹는 것.
이렇게 가리는 것이 없기에 고백한다.
가리는 것이 하나쯤 있는 취향을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어릴 때 호박이란 소리를 들었다고 호박은 절대 안 먹는 그,
부추로는 무얼 만들어도 먹지 않는다는 그,
쓴 걸 왜 먹냐며 커피를 안 마시는 그,
소맥은 먹어도 소주는 안 마시는 그,
회를 안 먹는 그,
계피를 싫어한다는 그...
뭐 하나 가리는 게 있는 그들이 은근히 있어 보인다. 까탈스럽게 자기만의 맛을 추구하는 예민한 감각을 지닌 미식가들 같다. 가리는 재료를 골라내는 걸 보고 같이 먹는 사람들이 별스럽다는 듯 쳐다보는 눈초리를 깡그리 무시하는 배짱도 있어 보인다. 자신의 취향을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이 싫어하는 것은 한 입도 삼키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까지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있어 보이는 것이 부럽지는 않다. 그들은 달큰한 호박죽과 고추 송송 부추전, 시나몬롤을 맛보지 못할 테니 말이다. 소주를 곁들인 회한 점과 향으로 마무리하는커피 한 잔의융합과 어울림을 경험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아무거나 잘 먹어서 좀 없어 보일지라도 특별한 취향이 없는 것이다행이다.
자신이 규정한 취향대로 하나를 콕 찍어 배제하면 경험의 폭이 그만큼 좁아진다.
난 원래 그래. 그런 거 안 좋아해.
이러다 보면 자기가 만든 범위 안에 갇히는 수가 있다.
이제껏 경험한 그것이 평균 이하였을 수도 있다. 탐스럽고 예쁜 호박을 본 적이 없다던지...
시간에 따라 취향이 바뀔 수도 있고. 물컹하고 질겼던 부추가 아삭하고 향긋하게 느껴진다던지...
취향이 없다는 건 열려있다는 것이다. 일단 받아들이고 경험해 본다. 장벽이 없다. 배제하지 않으니 뜻밖의 맛을 만날 확률도 높다. 그때그때 상황과 컨디션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하니 나의 현재 상태에 충실하다. 중요한 건 원래 그런 무엇이 아닌, 지금 원하는 무엇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