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니 라니 고라니

by 두두니

오후 4시, 산책하기 가장 좋은 시간이다.

길게 기울어져 내리는 햇살에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마법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 강변, 작은 다리를 건널 때였다.

뒤쪽에서 무언지 모를 거대한 에너지 파동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이끌리듯 휙 뒤돌아보았다.

난 입을 떡 벌리고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말만큼 큰 동물이 겅중겅중 뛰어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토록 큰 야생동물이 자연 속을 뛰어다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고라니였다.

고라니가 그렇게 큰 동물인지 몰랐다.

직접 체감한 점프 속도와 높이는 눈을 의심케 할 정도였다.

고라니가 저렇게 높이, 빨리 뛰는 동물이구나!


고라니는 들판을 병풍처럼 받치고 있는 야트막한 야산으로 금세 들어가 버렸다. 고라니의 뒷발에 패인 흙덩이들이 놀란 듯이 땅에 널브러져 있었다.

몇 걸음만 늦게 걸었어도 고라니가 내 머리 위를 날아올랐을 수 있는 거리였다. 아찔하고 무섭다기보다는 경이로웠다. 고라니가 내 머리를 뛰어넘는 일이 일어난다면 강복이라도 받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벌렁거리던 심장의 여운이 길게 이어졌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들꽃에 마음을 뺏겨 폰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을 때였다.

사박사박, 사박사박.

강가에 수북이 자란 풀숲에서 소리가 났다. 뭐지?

빼꼼!

풀숲을 헤치고 어떤 짐승의 머리가 불쑥 나왔다.

아유! 귀여워라!


급한 마음에 버벅대며 동영상을 찾아 눌렀다. 괜히 후닥닥거리면 달아날까 싶어 얼어붙은 듯 땅에 발을 박은 채 신중하게 찍었다.

녀석은 우물거리며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새끼라 뭘 모르는지 세상 느긋했다.

by duduni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녀석을 구경했다. 뒤에서 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 누구도 묻지 않았지만 궁금해할 게 뻔한 구경꾼들을 위해 서비스 차원으로 내가 설명해주마, 하는 뉘앙스였다.

"새끼네 새끼. 여기 고라니가 살거든. 지나다니면서 보니까 총 세 마리야, 어미하고 새끼 한 마리는 어디 갔는갑네. 지 혼자 있네. 여기 세 마리가 산다 카이."

노인 덕분에 고라니 새끼라는 걸 알았다. 말만 했던 어미의 새끼 중 한 마리로 추정되었다. 작년 늦가을의 일이었다.


며칠 전, 그러니까 올해 봄. 새끼 고라니다시 만나는 영광을 누렸다.

나만의 벚꽃 명당에서 실컷 꽃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 길, 마지막으로 노을 지는 하늘을 담으려는데 껑충껑충 점프하는 새끼 고라니가 잡힌 것이다. 마치 그림 속을 뛰노는 신선처럼 풀쩍풀쩍 뛰어 강가로 가는 녀석.

훌쩍 자라 있었다!

by duduni
무사했구나, 고라니야!

무사히 겨울을 지내고 건강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내가 이토록 감탄하며 만났던 고라니가 농사짓는 분들에게는 골칫거리 취급을 받는다는 걸 알고 있다. 울타리를 뛰어넘어 작물을 쓸어가기 때문이다. 연하고 맛난 작물만 골라 먹으니 영악하다 할지도 모르지만 고라니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게 틀림없다.


고라니는 우리나라와 중국 북동부에만 서식하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동물이다. 중국에서는 거의 멸종위기종이 되어 현재 지구 상에서 고라니를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한다(전 세계 고라니 개체수 중 90%가 우리나라에 서식). 우리나라 곳곳에 서식하는 토착 동물이기에, 우린 흔히 볼 수 있기에 그 소중함을 더 모르는 것이 아닐까.


야행성 초식 동물로 물에서 헤엄치는 걸 좋아해 영어로는 water deer다. 그래서 이곳 강가에 사나 보다.

우리나라 산하의 풀을 먹고사는 고라니가 사람들이 뚫어놓은 도로와 갈아엎은 땅을 피해 먹이를 찾아다니는 건 당연한 일일 거다. 이 땅의 주인 행세를 하며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다니는 고라니가 안쓰럽다. 그리고 미안하다.


작물을 망가뜨리고 별안간 도로에 침범해 사고를 유발하는 몹쓸 동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땅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근거 없는 우월감은 내다 버리고 야생동물과 공생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한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이라도 시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알려주어야 한다.

이 땅은 고라니도 우리도 다른 동식물도 모두 함께 살아가야 할 단 하나의 터전이라는 걸.


#팔현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