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는 다섯 살 여름까지 집에서 지냈다. 여섯 살 되면 유치원에 보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육아를 했지만 다섯 살이 넘어가자 슬슬 걱정이 되었다. 그 또래 동네 아이들은 한참 전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었고 놀이터에 가면 더 어린 동생들뿐이었다. 엄마와의 관계 형성이 잘 되어 있으면 괜찮겠지, 싶다가도 집에만 있다 사회성이 떨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 결국 2학기부터 근처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었다.
나이가 어느 정도 차서(?) 간 거라 아이는 바로 잘 적응했다. 몇 달이 금세 흘렀다. 유치원에 보낼 타이밍이었다. 어린이집 원장에게 유치원에 보낼 예정이라 어린이집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이제껏 칭찬 일색이던 원장이 대뜸 "얘가 사회성이 좀 떨어지거든요. 이 상태에서 바로 유치원 가면 적응 힘들 겁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지금이야 '헐, 인성 보소. 원생 이탈하는 게 아쉬워서 그런 거구만? 어쩌자고 이런 델 골랐을까. 몇 달만 다니길 다행이지.'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때는 그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박혔다.
안 그래도 내심 걱정하던 사회성을 들먹거리니 그때부터는 아이가 친구들과 잘 지내는지만 눈에 불을 켜고 보게 된 거다.
아이는 유치원도 초등학교도 친구들과 어울려 잘 다녔다. 다만 참관 수업이 있는 날이면 매의 눈을 장착한 엄마가 내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뚫어지게 관찰한다는 정도?
모계 쪽 유전으로 나는 걱정이 많은 편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쓸데없이 걱정이 많고, 안 해도 되는 걱정을 사서 하는 편이다.
친구들과 곧잘 어울려 지내는 아이라도 긴장감 도는 상황에 처할 때가 있다. 내 아이가 들고 있던 걸 친구가 가져간다던지 하는 상황... 그럴 때 "그거 내 건데?"라고 말할 수 있는 아이이길 바랬건만, 내 아이는 뺏기고도 아무 말 못 하고 뒤돌아서 다른 물건을 찾아들고 노는 아이였다.
아, 사회성이 떨어지는구나.
매의 눈에는 그게 큰 사건으로 보였다. 저렇게 자기표현을 제대로 못하는데 이 험난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나, 저렇게 순둥순둥 착해 빠져서 약삭빠른 애들한테 당하고만 살면 어쩌나...
하아, 참.... 이런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었다. 잘하는 것 9개 말고 부족한 것 1개만 엄청 크게 보였다.
내성적이고 샌님 같은 면이 있는 우리 아이가 친구와 친하게 지내고, 활달한 친구들 틈에서 기 안 죽고 잘 버티며 지내야 할 텐데... 이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바람대로 아이는 하나 둘 친구들을 사귀며 학교생활을 해 나갔다. 초창기 예민하기만 했던 나의 시선은 아이의 성장과 더불어 저절로 두루뭉술해졌다. 아이의 사회성에 대한 나의 이런 관심은 사춘기의 도래와 함께 막을 내렸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아이는 서서히 내 손을 떠났다. 초등학교 때처럼 동네 친구들이 아니니 아이의 친구들에 대해 자세히 알기도 어려웠다. 좀 날리는 애들과 어울리는 것 같았지만 내가 간섭할 수 없었다. 자기한테는 좋은 친구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내 관심은 자발적이 아니라 반강제로 끊어졌다. 어쩔 수 없는 수순이라 생각하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많은 중, 고등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 성인이 되었다.
며칠 전 어버이날, 딸기 케이크로 유명한 한 베이커리의 케이크를 들고 들어왔다. 중, 고등학교 때는 어버이날을 챙겨 받은 기억이 없어 처음엔 누구 생일인가, 싶었다. 어버이날 기념으로 사 왔단 말을 들으니 기분이 색달랐다.
케이크 중앙엔 카네이션 꽃이 꽂혀 있었다!
"제 친구가 그 빵집에서 알바해서 특별히 예약한 거예요."
아이는 편지를 손에 쥐어주고는 민망한지 약속이 있다고 나갔다. 같은 과 조원들과 만나서 과제를 해야 한단다.
그날 밤, 중간고사 준비를 하던 둘째가 닭강정이 먹고 싶다기에 검색해서 주문을 했다. 몇 분 후 큰 애가 전화가 왔다.
"엄마, 닭 시켰어요?"
"응, 근데 네가 어떻게 알아?"
"제 친구가 그 닭집에서 일하는데 우리 집 주소 떴다고 연락 와서요. 친구가 서비스 많이 넣어 준대요."
우리는 큰 아이 친구가 보낸 그득한 치킨 서비스와 또 다른 친구가 포장해 준 케이크를 먹었다. 남편이 피식 웃었다.
"옛날에 저 녀석 사회성 때문에 걱정하던 거 생각나?"
나도 따라 웃을 수밖에.
큰 아이는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두루 어울리는 넉살 좋은 아이가 되었다. 당구장에서 게임하며 만난 동네 백수 형부터 인라인 스케이터 친구, 주짓수 선수 친구, 웨딩홀 매니저 형, 미용사 친구, 래퍼 친구 등등. 공부하는 친구들도 서울에서 제주까지 포진해 있다.
이 아이가 사회성 때문에 고민했던 그 아이가 맞단 말인가.
지나고 보니 그때의 나는 경주마처럼 갇힌 시야로 아이를 보았던 것 같다. 어떤 하나의 요인으로 아이가 크는 게 아닌데 말이다. 엄마가 보는 만큼, 엄마가 생각하는 만큼 아이가 자란다. 그럴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좁은 시야와 좁은 소견으로 아이를 보았던 나를 반성한다. 내 잣대를 먼저 놓아둔 다음 대 보고 비교했던 지난날이 미안하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던, 하지만 부족했던 나.
아이의 첫 사회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 다른 아이와 비교하게 되고,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부정적인 경험을 할까 지레 걱정하고, 잘 어울리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하고 그래서 늘 마음이 조급했던 나를 돌아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아이가 잘 자라준 건 다섯 살 여름까지 지극정성을 쏟은 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때는 어떤 편견이나 잣대 없이 아이와 부대껴 놀며 지냈다. 온전하게 아이 자체만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끈끈한 애착과 건강한 유대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힘이 아이가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어린 시절, 엄마와의 관계가 좋았던 아이는 큰 탈없이 잘 자란다. 아이는 생각 이상으로 자기 삶을 잘 헤쳐나가기 때문이다. 큰 아이만 봐도 사춘기 때 어울리던 친구들 때문에 걱정이 있었지만, 스스로 취하고 끊어내면서 관계를 정리해나가는 듯했다.
엄마가 언제까지나 눈을 부릅뜨고 관여할 순 없다. 불안하더라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할 때가 온다.
지금까지 보았던 바로는 급한 엄마보다 느긋한 엄마가 아이를 잘 키운다. 느긋한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다 정말 필요로 할 때 손 내미는 엄마라면 그의 아이는 내버려 둬도 잘 자랄 거다.
케이크에서 카네이션을 뽑아 물이 든 작은 잔에 꽂았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남편이 한마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