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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Aug 10. 2021

수능 100일 선물과 조르바

수능이 100일 앞으로 다가왔다.

재작년과 작년 - 큰 아이 고3과 재수를 거치며 절실하게 와닿았던 d-100이라는 숫자가 지금 이렇게 무덤덤하게 되다니...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현실에 적응하는 게 맞지만 이렇게 빨리, 쉽게?

한때 조르바를 꿈꾸었던 내가 어느새 조르바가 된 것인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나서 '조르바'는 내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원초적이고 솔직하며 어떤 계산 없이 순간의 기분에 취해 행동하는 그가 부러웠다. 달빛 비치는 바닷가에서 술을 마시고 마음껏 웃고 떠들며 춤을 추는 그. 내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고 언제나 현재를 사는 그를 닮고 싶었다. 그는 내가 결코 될 수 없는 인간상이라 여겼기에 동경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둘째가 고2다. 내년이면 수험생이지만 오늘만 사는 이 엄마는 아무 느낌이 없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만 해도 나름 열혈 엄마였다. 중, 고등을 거치면서 열정은 점점 식어 그냥 내버려 두고 있다. 갈수록 더 신경을 써야 하지만 내 안에 불을 피울 장작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불은 내가 피울 게 아니라 아이가 피워야 하는 거니까. 불씨 전달을 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할 공부다. 이렇게 핑계 아닌 핑계를 대 본다.


큰애 고3 이맘때였다.

100일이라는 숫자에 모두들 긴장 100배가 되던 시기였다. 수험생 엄마로서 최소한의 정성이라도 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를 초월해 팔공산 갓바위(산꼭대기의 갓을 쓴 부처님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준다고 함. 수능 기도 명당)에 올라갔다 와야 하나, 특별한 100일 선물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딸이 수능을 치고 온 날, 엄마에게 적금통장 하나를 받았다. 수능 100일 전부터 엄마가 매일 만원씩 적금을 든 것이다. 최대 일곱 글자를 기재할 수 있는 '받는 통장 표시'란에 매일 응원 메시지를 넣었고 통장에 그 메시지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딸은 엄마의 정성에 감복하여 눈물을 펑펑 흘렸다는 내용이었다.


이거다, 이거!

스토리와 감동이 모두 있었다. 내 너를 위해 기꺼이 100만 원을 모아 줄 테다.

당장 은행에 가서 통장을 만들었다. 수능날 직접 전달해야 하니 실물 통장이 있어야 했다. 인터넷 뱅킹으로 매일 입금하며 받는 통장 표시 란에 7자를 적어 넣었다.

이런 식이었다.

대부분 희망에 찬 내용인데 좀 해이하다 싶을 때 '정신차리자아들' 이런 글도 적었다.

한창 열심히 입금을 하던 어느 날,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기사에 나오는 여학생이야 엄마의 정성을 알아주는 데다 수능도 잘 쳤을 테지만 '우리 아이가 과연 그럴까'... 싶었던 거다. 그런 데 둔감한 아이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수능을 다 치르고 나서 통장을 주는 건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동기 유발이라든가 의욕 충천 같은 좋은 효과를 놓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뭐든 아이의 특성에 맞춰야 성공하는 법.

마침(?) 아이가 한창 힘들어하던 시기였다. 이런 에 미리 통장의 존재를 선공개하고 엄마의 정성과 간절한 메시지를 본다면 힘을 내고 더 열심히 할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아이를 독서실에 태워주는 시간이었다. 통장을 챙겨 두고 할 말도 짜 두었다.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천성이 천하태평인 아이지만 고3이니만큼 예민의 끝을 달리고 있던 터라, 미리 양해를 구했다. 잠깐 은행 CD기에 들렀다 갈 거라고.

"아, 정말! 독서실 빨리 가야 되는데..."

아으, 저 노무 짜슥! 엄마 속도 모르고!(어금니 꽉)

초인적인 힘으로 바라락 끓어오르는 성질을 가라앉히고 부드럽게 말했다.

"잠깐이면 돼."

 

통장은 발급받을 때 말고는 인터넷 뱅킹으로 입금했기에 깨끗한 상태였다. CD기 부스 앞에 도착한 나는 아이에게 통장을 건네며 "정차 중이니까 네가 가서 통장 정리 좀 하고 올래?"라고 말했다.

"통장 정리는 어떻게 하는데요?"

엥? 아, 그러고 보니 얘가 카드만 써봤지 통장 들고 이런데 와본 적이 없구나....

설명을 해 줬다. 아이가 부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괜스레 마음이 울컥울컥 했다. 지금 통장에 타라라라 찍힌 글자를 보고 감동받아서 입틀막 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아! 내가 먼저 울면 안 되는데. 엄마가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드디어 아이가 나왔다.

차에 탔다.

통장을 내게 건넸다.

난 뭉클함을 애써 감추며 아들을 돌아보았다.

무덤덤.

"너 통장 안 봤어?"

"안 봤는데요. 아, 뭐 그렇게 찍히는 게 많은지 한참 걸리네. 어으."

뎅!

역시 드라마 같은 드라마틱한 장면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밥이 있어도 먹질 못하는 녀석이니 할 수 없지. 입에 갖다 떠 넣어주는 수밖에, 에혀.

"자. 통장 안에 글자 좀 읽어 봐. 네가 읽어볼 줄 알고 일부러 보냈두만."

나는 통장을 휙 건넸다.


.....

차락 차락 통장 넘기는 소리.

훌쩍 소리.

"아... 엄마!"

슬쩍 보니 녀석 눈시울이 빨갰다. 아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가, 우리 아들 힘내라고(울컥) 매일매일(흐윽) 적금 든 거야. 기도하는 마음으로(목소리 바르르). 100일 끝까지 모았다가 수능 날 줄게. 나중에 대학 가서 필요할 때 써."

"엄마, 요즘 괜히 짜증만 냈는데 죄송합니다. 저 더 열심히 할게요. 감사합니다, 엄마."

아이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슬렀다.

그래, 이만하면 대성공이지.

겨우 끼워 맞추기는 했지만 이벤트는 괜찮았다. 힘들어하던 아이가 힘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통장에 100일을 다 채웠다, 수능날 아들 책상에 살포시 올려두었다. 수능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보고 기분 좋으라고.

이 역시도 계획대로 되진 않았다. 아이는 수능을 잘 못 쳤고, 그럼에도 수능 끝난 기분 내느라 늦게 들어와 그대로 뻗어 잤기 때문이다. 나 또한 통장은 잊고 있다가 며칠 후 생각이 났다. 통장 봤냐고 물었더니 책상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들은 재수를 결정했고, 통장은 다시 내 손에 들어왔다.

"이거 엄마가 갖고 있다가 줄게."

"저 지금 쓸 건데요?"

"대학 가서 쓰라고 준 거거든? 지금 쓰면 흐지부지 돼."

"아! 엄마!"


우여곡절 많던 수능 100일 통장이었지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 친구들과 여행  때 야무지게 뽑아 썼다.

거 봐라. 그때 엄마 말 듣길 잘했지?


첫째 아이 100일 통장을 채울 때 생활비에서 쪼개 쓰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나서 둘째 때는 고1 때부터 여유 있게 준비해야지, 생각했는데 어디 일이 그렇게 맘먹은 대로 미리미리 착착 실행되고 그런가. 여태껏 시작도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난 어느새 오늘만 사는 조르바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살기 바쁘기에 내일을 걱정할 틈이 없다. 둘째는 아직 고2고, 나는 고2 엄마라 아무 생각이 없다. 고3 엄마가 되면 그때 맞게 살면 되겠지.


큰 애가 재수를 거치면서 성숙해졌다면 엄마인 나도 그 시기를 지나오며 달라진 것 같다. 삶은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 부닥치는 상황에 맞게 살면 된다는 것. 그렇게 살아야지 하면 또 살아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힘든 시기를 지나면서 거기서도 배우는 게 있었다.

 

오늘도 그저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뿐이다. 이런 단순한 삶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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