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좋은 날을 그냥 보내긴 아깝지. 저녁은 일부러 가볍게 먹었다. 식사 후 바로 달리기는 무리이기에 걷기로 했다. 오랜만의 일상복 산책이다. 런데이 앱이 아닌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한낮의 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 얇은 긴 팔 티셔츠 직조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 샤워에 가슴이 뻐근해진다. 아, 좋다! 나오길 너무 잘했어!
음악에 맞춰 발걸음을 놀린다.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저절로 손이 올라온다. 바람의 지휘자가 되어 리드미컬하게 공중을 휘젓는다. 부끄러움은 어둠 안으로 녹아들었음이 분명하다. 이목구비를 적당히 가려주니 훨씬 안정감이 생긴다. 이래서 밤엔 용감해지나 보다.
어떤 코스로 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로 가자. 그 길이 밤에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산책길로 가는 대로변 큰 다리를 건넜다. 낮에는 뙤약볕에 왕복 10차선을 통행하는 차량에 자동차 소음에 극혐하는 구간이다. 저녁이 되니 조로록 켜진 가로등에 쌩쌩 달리는 자동차 불빛이 몽환적인 느낌을 주었다. 다들 어디론가 달리고 있네. 나는 이 많은 사람 중 하나로구나... 이래서 밤은 사람을 멜랑꼴리하게 만드나 보다.
다리를 지나 둔치에 도착했다. 탁 트인 하늘이 먼저 보인다. 희뿌연 하늘엔 해가 미처 끌어가지 못한 미미한 핑크빛 베일 자락이 남아있다. 그 위로 손톱달이 아스라이 떨어져 있다.
by duduni
둔치로 내려가자 어두워진 들판이 기다리고 있다. 어스름 속에서 들꽃들이 은은하게 색을 발하며 살랑인다! 너네 밤에 보니 더 예뻐 보이네? 이래서 밤엔 뭐든 달라 보이나 보다.
수면에는 호박색 호텔 불빛이 어려 멋들어진 조명이 되어주었다. 노랑, 청보라, 색 바랜 베이지 꽃들이 어두운 풀색 위로 동동 떠 있다. 밤의 들판은 낮과는 전혀 다른 매력이 있었다.
by dud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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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날씨에 바람맞으며 걷는 길이 하나도 힘들지 않다. 내친김에 하류 쪽으로 넘어가 더 걷기로 한다. 아까 건너온 10차선 다리 아래를 지나간다. 다리 아래의 어둠 속 저편은 영화 '괴물'을 연상시킨다. 사진 한 장만 얼른 찍고 지나간다.
by duduni
조금 내려왔을 뿐인데도 강 폭이 확 넓어졌다. 산책하는 사람들도 확 늘었다. 넓은 강물 위로 건너편 유원지의 불빛이 어른거린다. 오래된 간판이며 낡은 건물들은 불빛 속으로 사그라져 보이지 않는다. 색색의 조명만이 낭랑하게 빛난다.
이래서 밤이 편안한가 보다.민낯을 까놓고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으니 민망할 게 없다. 고단한 삶의 흔적일랑 어둠 속에 내버려 두고 등불 스위치를 딸깍 켜 제일 볼만 한 부분만 내보인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그 한 줄 마저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부여잡은 그 한 줄이 위안이 된다.
by duduni
제법 많이 걸었다. 몸의 열기가 시원한 바람을 이겼다. 땀이 난다. 돌아갈 시간이다. 둔치를 지나 둔덕 길에 올랐다. 나무 터널 사이를 지나가기로 한다.
봄날 황홀한 꽃비를 뿌려준 벚나무 터널이다. 밤의 색으로 물든 나무가 길을 열어준다. 발걸음이 느려지고 지칠 즈음 이어폰에서 나오는 감미로운 기타 선율이 내 손을 이끈다.
by duduni
밤 산책의 BGM은 기타가 베스트구나! 아련한 기타 소리와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한다. 이래서 밤이 낭만적인가 보다. 빛이 차단된 나무 터널 속 어둠과 벚나무에 이는 바람결에 실린 기타 선율이 지친 나를 웃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