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말 한마디
남편의 대답은 캔버스 위에 툭 떨어진 화이트 물감 중에서도 가장 밝고 은폐력이 강한 티타늄 화이트 물감 같았다. 어떤 복잡한 색깔도 단숨에 덮어버리고,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그런 명료함 자체였다.
오늘도 75km를 3시간 동안 출퇴근 하고, 중학교 미술실에서 아이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돌아왔다. 마음의 팔레트엔 채도 낮은 회색빛 짜증이 가득 묻어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주섬주섬 치워야 들어갈 수 있는 어질러진 집안에서 사소한 것들에 날을 세우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참 못났다 싶던 찰나, 문득 궁금해졌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도를 닦길래 내 날카로운 모서리에 한 번을 찔려주지 않는 걸까.
"오빠, 오빠는 내가 이렇게 짜증 내고 화낼 때도 왜 한 번을 같이 화를 안 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 질문에 남편은 마치 늘 준비해 둔 정답을 꺼내듯,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어떻게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나요?"
그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사랑받고 있다는 확인 도장을 꾹 눌러 받은 기분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주먹에 한 방 세게 맞은 기분이 들었다.
미술에서 '여백'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주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비워둔 배려의 공간이다. 남편은 내가 쏟아낸 감정의 오물들을 자신의 마음이라는 커다란 도화지에 큰 여백으로 받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화를 낼 줄 몰라서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그 화보다 훨씬 더 무겁고 소중했기에 기꺼이 삼켜버린 것이다.
성인군자일까, 아니면 사랑에 눈먼 고단수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그 한마디는 내 안의 들끓던 열기를 순식간에 식혀주었다. 덕분에 나는 오늘 화내는 소중한 사람에서 반성하는 사랑받는 사람으로 내 정체성을 다시 그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