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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풍뎅이 Nov 26. 2019

꼬리곰탕에 담긴 사랑

"김장김치 가져다줄게. 오랜만에 가보지 뭐." 하는 핸드폰 너머의 아빠 목소리는 좀 들떠 있었다.


 지난 일요일, 엄마 아빠가 거의 2년 만에 우리 집에 오셨다. 현관을 열어보니 엄마는 커다란 솥 냄비를 들었고, 아빠는 두 시간이 걸린 운전에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엄마 아빠와 딸아이를 두고 남편과 나는 아빠차에 가득 실린 짐을 내렸다. 뭘 이렇게 많이 가져왔나.. 싶을 정도로 차 뒷좌석은 10킬로짜리 쌀포대, 김치통, 과일박스, 밑반찬, 세탁세제, 각종 생필품으로 가득했다. 원래도 부모님 댁에 가면 차가 무거워질 정도로 이것저것 많이 싣고 와서 돌아오는 길은 늘 미안함에 가슴이 찡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오랜만에 딸네 집에 간다고 바리바리 많이도 챙기신 모양이다.

사실 엄마 아빠의 방문에 대비해 나와 남편도 많은 준비를 했다. 토요일에 마트 가서 장을 잔뜩 봐와서 냉장고를 꽉꽉 채워놨고(냉장고 꽉 차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둘 다) 일요일 아침엔 집을 좁게 보이는 잡동사니들을 안 보이게 다 치워놨다. 거의 대청소 급. 꼭 이렇게 까지 해야 되나 했지만 남편은 텅 빈 냉장고와 좁은 집이 자기 탓이 되는 것처럼 나보다 더 신경 쓰면서 연신 냉장고를 열고 닫고 집을 빙 둘러보길 반복했다. 과자까지 냉장고에 집어넣길래, 그런 건 넣지말라 말렸지만 더 꽉 차 보인다며 흐뭇해했다.(그 과자들을 본 엄마는 안 넣어놔도 된다며 바로 뺐다.) 이런 준비들을 하면서 문득 응답하라 1988에서 선우 엄마가 갑작스러운 엄마 방문에 동분서주하던 장면이 생각났다. 동네 최고 갑부 정봉이네서 연탄에 스팸, 각종 먹을거리들을 빌리고 후줄근한 옷도 가장 깨끗하고 괜찮은 걸로 갈아입고 숨가쁘게 준비했는데 엄마는 번갯불에 콩궈먹듯 주스만 벌컥 마시고 돌아가셨다.(그 짧은 시간에도 딸이 어떻게 사나 쭉 둘러보셨다.) 그 후 엄마가 놓고 간 편지와 돈을 발견하고 눈물 흘리던 선우 엄마, 시대는 다르지만 딸네 집에 오는 엄마 마음과 그런 엄마를 맞이하는 딸 마음은 지금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와서 신난 딸은 조잘조잘 본인의 왈콩이(가장 아끼는 인형)를 설명해 주고 요즘 꽂힌 응가송과 밥송을 집이 떠나가라 불렀다.주말에 엄마 아빠와 놀다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시니 엄청 들뜬 모양이다. 엄마가 좋아하는 초밥 아빠가 좋아하는 국수를 먹고 우리가 자주 가는 옆동네 카페로 가서 커피 한잔하며 아이가 부리는 애교도 보고 이런저런 얘기도 나눴다. 집 1층에 와서는 비 많이 오기 전에 빨리 가야 된다며 휑하니 가셨다.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며 아이손에 5만 원을 꼭 쥐어주고는.

집에 올라와보니 엄마가 놓고 간 꼬리곰탕이 눈에 들어왔다. 물 더 붓고 팔팔 끓여서 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가셔서  재빨리 물을 붓고 끓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어설피 채운 냉장고는 엄마의 반찬과 과일로 더 가득 찼고 가뜩이나 좁은 베란다는 쌀과 세제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잘 가셨냐고 전화해보니 잘 도착했다란 말과 함께

 “오늘 돈 많이 썼지?"


아빠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 몇 번이나 얘기하셨다. "아빠 이제 우리도 다 결혼했고 그나마 여유좀 생겼잖아. 아등바등 안 살아도 돼. 엄마랑 좀 즐기면서 살아" 해도 아니라고, 도대체 아빠는 왜 그토록 월급을 올려달라고 회사에 무리한 얘길 할까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동생이 그런다.

아빠는 우리 먹을 것과 손주들 용돈 넉넉히 주고 싶어서 돈 많이 벌고 싶다 했다고. 괜히 눈물이 났다. 한때 넉넉지 않은 우리 집을 원망하고 또 되지도 않는 거짓말로 용돈 받아서 간식 사 먹고 그랬던 철딱서니 없던 나의 모습에.

한평생 헌신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인생을 산 우리 엄마 아빠의 모습에.

나는 엄마 아빠의 딸로서 34년을 살았다. 그리고 우리 딸의 엄마가 된지는 4년 차다. 멀리 떨어져 있고 몸이 약해 늘 걱정되는 딸이고 우리 아이에겐 서투르고 어설픈 엄마다. 표현이 서툴러 무뚝뚝한 부모님에게 서운한 적이 많았는데 살가운 표현 대신 부모님 나름의 방식으로 날 사랑해왔고, 딸에게도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음을 요즘 많이 느낀다.

다 갚을 수 있을까. 엄마 아빠가 다녀가고 허투루가 아닌 잘 살아가야 할 동기를 얻고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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