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드라이된 수선화가 속삭이는 말

11월과 에메랄드색 프라이드

by 한꽃차이
"오라버니.. 오라버니.. 왜 그러세요? 오라버니, 편찮으세요?"
마릴라는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앤은 하얀 수선화를 한 아름 안고 현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앤은 그 후로 오랫동안 하얀 수선화를 보거나 향기를 맡을 수 없었다.


수선화를 볼 때마다 매슈의 죽음이 생각나 앤은 심장이 조여오듯 아팠을 것 같다. 살다 보면 누구나 수선화 한 송이 가슴 깊은 곳에 품게 되지 않을까.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시간, 장소, 사물, 말, 음악, 냄새 같은 것들 말이다. 나의 수선화는 11월과 에메랄드색 프라이드다.


열다섯 살의 11월, 담임선생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한창 감수성 예민할 나이에 겪은 첫 죽음이었고 선생님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충격이 컸다. 학교 주차장 한 구석,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에메랄드색 프라이드 옆에 쪼그리고 앉아 울었다. 어른이 되기 전이었기에 울고 싶은 만큼 울 수 있었다. 눈물은 말랐어도 기억은 선명하다.


한동안 프라이드만 보면 생각났지만 이제는 무척 드물게 보이는 차가 됐다. 하지만 출산한 달이 다가오면 몸이 쑤신다는 엄마들처럼, 11월이 되면 마음 한편이 욱신거린다. 아니, 이미 9월부터 올해도 11월이 오겠구나 라는 생각이 노크도 없이 마음 문을 벌컥 열 때가 있다. 꽉 조이는 옷을 입은 듯 숨쉬기가 불편해져 심호흡을 해본다. 슬픔 때문은 아니다. 슬픔과 고통은 죄송스러울 만큼 오래가지 않았다. 다시 웃을 수 있었던 앤처럼. 대신 삶이 묵직해졌다. 죽음이라는 무게가 더해졌기 때문이리라.


오늘 함께 웃었던 누군가를 내일이면 못 볼 수 있다 - 이 사실이 가슴에 새겨져 있는 건 머리로 아는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이 무게 추는 때로 결정의 저울을 한쪽으로 기울게 했다. 앤이 대학에 가지 않기로 한 건 매슈의 죽음이라는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릴라도 언제까지나 곁에 있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앤은 깊이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결정이 우울하지는 않았다.


잠자리에 들었을 때는 앤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고 마음은 평온을 되찾았다. 앤은 자신의 의무를 용감하게 직시했고 그 의무감이 힘이 되었다. 우리가 솔직하게 의무와 맞대면할 때에 그렇듯이.


달리고 싶은 들판에서 올라가야 하는 산으로 방향을 돌려야 할 때가 있다. 그러다 기쁨의 숲을 발견하기도 한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첫 목적지를 고집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곳은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게 아닐까. 어느덧 그날 이후 20여 년이 흘렀다. 예상치 못한 삶의 반전이 유독 11월에 많았다. 매년 작년 이맘때를 떠올려보면 그때는 생각지 못했던 길에 서있었다.


그렇기에 11월은 생각이 낙엽처럼 쌓인다. 내 소중한 사람들은 언제까지 곁에 있을까, 올해의 열매는 무엇인가, 내년 가을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엄마가 되니 두 살이라던 선생님 아이는 얼마나 컸을까, 부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는 생각까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부지런히 빗자루질해도 별 소용없음을 알기에 수북해지게 내버려 두고 푹 파묻혀 보기도 한다. 아이들 감기에 해열제가 늘 답이 아니듯, 겪을 일은 겪는 게 좋다.


마침내 12월, 잎을 모두 떨구어낸 나뭇가지처럼 홀가분해진다. 커피 한잔 사이에 두고 낯설지 않은 죽음을 앉혀본 의자에 더 소중해진 삶을 불러온다. 내년을 미리 시작하고 싶어 진다.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대견한 벗을 들인다.


지난겨울에 히아신스, 헬레보루스, 수선화를 키웠다. 수선화만이 일주일 만에 모두 피어났다. 향도 진해서 어느 날 집에 들어오면서 보지 않고도 아이에게 반갑게 외쳤다.

"그새 수선화가 피었나 봐!!"

오래 피어있었어도 지는 게 못내 아쉬웠는데 의외로 드라이된다는 발견이 반가웠다. 눈 속에서도 핀다는 겨울꽃답게, 올여름의 유독 긴 장마를 지나고도 깊은 노란빛을 잃지 않았다. 바스락 소리가 아픈 기억을 잘 겪어내면 추억이 된다고 속삭이는 듯 하다. 올 겨울이 기다려지는 건 어린 시절의 별사탕 같은 수선화 향기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수선화도 언젠가는 추억처럼 마르길. 크기는 줄어들어도 세월의 색감을 간직한 채 너무 옅지도 선명하지도 않을 만큼. 아련한 향기에 숨 한번 들이마시고 다시 한 발짝 내딛길.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앤의 부케는 당연히 장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