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날이었고 길도 아름다웠다. 헤스터의 정원에 도착해서 낡은 벤치에 앉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곳도 아름다웠다. 오래전 다이애나, 제인, 프리실라와 소풍을 나와 이 자리를 찾아냈던 그날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그때는 수선화와 바이올렛이 예쁘게 피었는데, 지금은 구석에 과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내게는 꿈이 있어.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때가 자주 있긴 했지만, 계속 그 꿈을 가지고 있지. 나는 벽난로가 있고, 고양이와 개가 있고, 친구들의 발자국 소리와 네가 있는 가정을 꿈꿔.
예전에는 이토록 중요한 장면에 과꽃은 너무 평범하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확신하게 된다. 몽고메리가 수많은 꽃들 중에서 이 꽃을 고른 건 옳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소박함, 청순함, 오래 곁을 지키는 성실함, 사랑의 결실 같은 과일 향기.. 이걸 다 가진 꽃은 과꽃뿐이기 때문이다.
존재감은 크지 않아도 과꽃은 길고 긴 사랑이 결실을 맺는 자리에 어울리는 최고의 방청객이었다. "나의 사랑은 당신의 사랑보다 믿음직하다"라는 꽃말을 피켓처럼 들고 잔잔한 과일향기를 흘려보내겠다는데 몽고메리 방송국이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정말 길버트의 사랑은 믿음직할까? 세상에는 많은 순정남 이야기가 있지만, 청혼에 성공하는데 길버트만큼 오래 걸린 남주인공도 드물다. 둘은 첫 만남부터 틀어졌고, 화해하는데 5년이 걸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앤 이야기는 그들이 화해한 날 끝난다. 하지만 길버트가 결혼식 전날 한 말처럼, 그에게는 그 날이 시작이었다.
그날 밤 앤을 그린 게이블즈 문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왔을 때 나는 온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였어
실제 앤 이야기는 열두 권의 전집이고, 거기까지는 1권일 뿐이다. 2권에서 앤과 길버트는 2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절친이 되고, 학비를 모아 함께 대학에 진학한다.
친구일 뿐이라는 앤에게 2년 후 청혼하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하기도 한다. 심지어 앤은 대학 최고의 엄친아와 2년간 만나 길버트를 가슴 졸이게 한다. 길버트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앤은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5+2+2+2=11. 장장 11년에 걸친 순애보라니, 잘생긴 장난꾸러기로만 알았던 길버트의 재발견이지 않은가? 내게 과꽃은 길버트의 사랑이다.
쌀쌀해진 10월의 새벽 꽃시장, 길버트가 생각나서 마지막 과꽃을 샀다. 국화와 닮았고 국화과이지만 의외로 과꽃은 여름꽃이다. 환절기가 되면 플로리스트는 늘 고민이다. 지난 계절의 마지막 꽃을 살 것인가, 시작된 계절의 꽃을 살 것인가. 새로운 가을꽃이 반가우면서도 내년에야 볼 수 있는 여름꽃이 아쉽다. 대개 이제 들어온 꽃은 싱싱하고 끝물인 꽃은 오래가지 않는다. 하지만 과꽃은 지금 내 곁에 13일째 피어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 과꽃의 원산지는 우리나라 북부지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캐나다 한 구석, 프린스 에드워드 섬까지 이주했을까. 1800년대 초에 프랑스 신부가 유럽에 전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과꽃을 사랑한 누군가가 캐나다로 갈 때 고이 들고 갔을 것이다. 오래 피는 꽃이니까 먼 여행도 견뎌줄 것이라 생각했던 그들의 믿음대로 과꽃은 이렇게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흔치 않은 하얀 과꽃이 세상 청순한 시골 소녀 같다. 짙은 컬러는 과꽃을 가릴 수 있으니 하얗고 조그만 레이스플라워와 살짝만 피치빛이 도는 스노우베리로 꽃다발을 만들었다. 오래 곁을 지켜준 믿음직한 누군가를 떠올리며, 당신에게 힐링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