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한 제비꽃

헤스터 그레이의 정원은 아니지만

by 한꽃차이
"어머, 얘들아, 저 제비꽃들 좀 봐! 저 모습은 내 가슴속에 그림처럼 남을 거야. 내가 여든 살이 되어도. 만약 여든 살까지 산다면 말이야, 눈을 감으면 지금 눈 앞에 있는 저 제비꽃들이 생생하게 떠오를 거야. 제비꽃은 오늘 얻은 첫 선물이야."

앤이 스스로 정한 생일파티 날이었다. 봄에 태어나지 않은 게 아쉬웠던 앤은 생일파티는 봄소풍으로 하자며 세 친구를 초대했다. 물론 앤의 생일은 3월이지만 캐나다의 3월은 봄이 아니다.


네 소녀는 헤스터 그레이의 정원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늘 다니던 길에서 언덕 하나 넘어가니 숨어있었다. 나중에 길버트의 청혼 장소로 선택될 만큼 아름다웠다. 무대가 에이번리이니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을지, 몽고메리 감독이 장소 선정을 얼마나 고심했을지 생각해본다.


스물두 살에 숨을 거두었다는 헤스터 그레이.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준 정원의 벤치에 누워 그가 미소 지으며 지켜보는 가운데 잠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가 덮어준 장미에 파묻혀서. 장미 담요라니, 몽고메리만이 연출할 수 있는 지상 최고의 로맨스다. 앤이 눈물을 흘린 건 당연했다. 그 이야기는 영원히 기억될 아름다운 생일선물로 남았다. 앤은 그 뒤 매슈의 무덤에 갈 때마다 헤스터 그레이의 무덤에도 꽃을 바쳤다. 그녀의 정원에 핀 장미로.


책 전체 흐름상 크게 중요하지 않은 에피소드이다. 아름다운 날과 로맨틱한 이야기는 이 외에도 얼마든지 많다. 그렇지만 내게는 이 작은 하루가 앤의 소녀시절 축소판 같다. "만약 헤스터 그레이의 정원을 찾아내지 않았다면?"이라는 질문이 몽글몽글 솟아났기 때문이다.


그 위대한 발견이 없었더라도 앤은 그 날을 아름다운 소풍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길을 나서자마자 제비꽃을 첫 선물로 삼은 것처럼, 두 번째 세 번째 선물을 찾아냈으리라. 생일선물을 한 아름 안고 초록지붕으로 돌아갔을 앤이다. 소박한 제비꽃을 여든 살까지 기억하겠다는 사람에게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의 창고대개방이다. 앤의 삶이 다채로웠던 건 판타스틱한 모험이 펼쳐져서가 아니었다. 평범한 날도 특별하게 만드는 능력 때문이었다. 앤이 마릴라에게 한 말처럼.


결국 정말로 즐겁고 행복한 나날이란 굉장히 멋지고 놀랍고 신나는 일이 일어나는 날이 아니라, 진주알들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그런 날들인 것 같아요.


작은 진주알처럼, 제비꽃은 색이 화려하지도 모양이 독특하지도 않다. 아이 손톱만큼 조그마하고 키도 한 뼘이 안 된다. 숨바꼭질의 고수랄까, 매일 지나다녀도 눈에 띄지 않을 확률이 아주 높다. 그래서인지 꽃말도 '나를 생각해주오'이다.


제비꽃이 민들레처럼 흔하다고 하면 당신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럴 리가? 나는 제비꽃을 자주 발견한다. 오랜 친구는 많은 사람들 틈에서도 눈에 잘 띄는 것과 비슷하다. 내게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제비꽃이 있다. 대학 캠퍼스 도서관과 담 사이 좁은 돌길에 있는 그 친구를 보기 위해 지름길로 다니지 않았다.


제비꽃을 찾듯 아침마다 괜찮은 하루가 될 거리를 만든다. 특별한 재료 없이 집밥 같은 아침 레시피다. 일단 금요일은 소망이 있고 토일요일은 편안하다. 월화수목요일도 절반은 햇살이 맑다. 잠투정이 유난히 많은 아드님들이 둘 다 잘 일어나는 날도 클수록 늘어난다. 거울을 보았을 때 앞머리가 밤에 말리고 잔 그대로라든지 (아침은 바쁘고 나는 앞머리를 잘 손질하는 재주가 십 년째 선인장처럼 느릿느릿 성장 중이다), 피부톤이 맑다든지. 거울 옆에는 소중한 사람들이 준 쪽지들과 아이의 어릴 적 귀여운 사진들, 남편 사진 중에서 좋아하는 사진이 붙어있다. 모두 평범하지만 특별한 나만의 제비꽃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날은 돌 잔칫날이 아니다. 예쁘게 사진 찍어보겠다는 계획이 없던 일상이 대부분이다. 사진으로 남기지 못하는 보물도 가득하다. 오동통한 손으로 엄마손을 꼭 잡던 아기만의 온도, 엄마를 보고 그날따라 유난히 반가워하며 뛰어와 폭 안기던 감촉, 낙엽을 한 아름 모아 하늘로 던지며 세상 행복해하던 까르르 웃음소리, 아이스크림 엄마 한 입 먹으라 했는데 많이 베어 물었다고 뚝뚝 흘리던 눈물방울. 짧은 봄처럼 상자에 담아둘 수도 없이 지나가는 게 아쉽다.


헤스터 그레이의 정원이 아니어도 좋다. 오늘도 제비꽃 한 송이쯤은 피었을 거다. 생각보다 그리 꼭꼭 숨어있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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