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희랑은 2년간 같은 반이었다. "또 졸았어?" 수업시간에 꾸벅거린 태희에게 내 짝지가 하는 말에도 그저 배시시 웃는 태희가 좋았다. 웬만한 일은 웃어넘겼다. 김칫국물 배지 않는 최고급 원목 도마 같았다. 대학 때 기숙사로 전화가 왔다. 안 좋은 일이 있다고, 오래전 일처럼 차분히 얘기했다. "아.. 어쩌다가.."라는 미숙한 내 위로에 "그냥, 그렇게 됐어."라고 돌부리에 걸려 잠시 넘어진 듯 툭 털어냈다. 한 번도 남 뒷얘기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도 늘 이런저런 말에 둘러싸여 지냈다. 심하게 예쁜 여자의 타고난 운명이었다. 반장선거 때도 태희는 조용히 말하고 얼른 내려왔다. "저.. 반장 해봤는데.. 저랑은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저는 기권할게요." 다른 아이가 했으면 그러려니 지나갔을 말이었다. 하지만 태희였기에 뒷말이 많았다. 반장 안 해본 사람 누가 있냐고, 해봤다고 자랑한다고. 평화주의자인 나는 앞에서 반박하진 못했지만 뒤에선 태희 편이었다. 워낙 남을 부러워 않고 자족하며 사는 성격이라 질투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유명해지면서부터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저 보일 때마다 혼자 반갑고 응원한다. 이제 태희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아졌다. 외모, 재산, 남편 이런 것들 때문일 것이다.
나도 부럽다. 그런데 이유는 다르다. 정확히는 강렬한 부러움이 한번 있었다. 어느 날 교실을 꾸미다가 잘 안 돼서 버벅거리고 있는데 태희가 도와줬다. 그저 몇 번 스스슥 손길이 스쳤는데 작품이 완성됐다. 순간 가슴에 찌릿 꽂힌 전류가 생생하다. '멋지다!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
꽃을 배우면서 종종 그 느낌을 마주했다. 선생님이 내 작품에 몇 송이 빼거나 더하거나 위치만 살짝 바꾸었을 뿐인데 확 달라 보이는 순간, 저절로 나오는 감탄이 낯설지 않다. 작은 디테일로 완전히 달라지게 하는 능력은 늘 나의 목표다. 조금씩 바꿔가며 남의 눈에 똑같을 사진을 수십 번 찍고 들여다본다. 왜 느낌이 다른지가 보이고 설명할 수 있을 때 희열을 느낀다.
요즘은 진로탐색을 어려서부터 한다. 좋아하는 것을 해라, 부러운 것이 하고 싶은 것이라는 말도 낯설지 않다. 그런 걸 알고 학과를 선택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가끔은 아쉬울 때가 있다. 늘 사부작 거리며 뭔가 만들고 옆반의 모르는 아이에게도 선물포장을 부탁받던 아이였는데 말이다. 그저 성적에 맞춰 대학을 나오고 짧지 않게 회사를 다녔다.
백수가 되어서야 꿈꾸기만 했던 공예를 배워볼 용기가 났다. 여러 공예를 하다 결국은 가장 하고 싶던 꽃을 하니 내가 꽃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더욱 분명했다. 다른 공예는 재료가 같으면 내가 하나 남이 하나 비슷한 결과물이 나오는 것 같아 끌리지 않았다. 동일한 꽃으로 만들어도 남과 다른 나만의 작품이 탄생하는 게 좋았다.
꽃을 통해 내가 컬러에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같은 꽃도 딱 맞는 컬러를 찾아 꽃시장을 몇 바퀴 돈다. 처음 보거나 내게 익숙지 않은 컬러 조합을 찾아 책과 온라인을 늘 탐색한다. 매주 다른 꽃이 나오니 새로 알아가야 하는 도전도 소풍처럼 즐겁다.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 내 사물함에는 늘 48색 색연필이 있었다. 교과서에도 문제집에도 빨간색이나 형광색으로는 절대 밑줄 치지 않았다. 눈이 편안한 여러 컬러로 예쁘게 필기한 내 교과서는 시험기간이 되면 여기저기 바삐 불려 다녔다. 인사팀에서 꽤 오래 일했는데도 올블랙 정장만은 요리조리 피해 그레이나 네이비를 입었다. 지금도 집에 레드와 블랙 소품은 들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대부분의 면에 무던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해왔다. 예민함이 귀히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꽃을 하고 나서 깨달았다. 재료를 주문 배달하고 보관해둘 수 있는 공예가 참 편했다는 것을. 새벽 일찍 사 와야 하고 시들까 잘못 사 올까 조마조마하다. 그럼에도 살아 숨 쉬는 것만이 줄 수 있는 촉감과 교감은 그 모든 수면부족과 수고를 가뿐히 이기는 매력이다. 게다가 재료가 스토리를 지니고 있는 건 꽃뿐이다. 나는 그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꽃 곁에 오래 앉아 눈을 맞추며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나는 돌고 돌아 꽃을 통해 나를 발견했다. 혹시 떠오르는 기억 한 자락, 아직 읽지 못한 책 같은 무언가가 있다면 한번 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잘하고 계속하고는 후속편이고, 나를 들여다보는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