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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꽃차이 Dec 20. 2020

숫자가 없어 더 현실적인

브런치 북 추천, <작아도 사랑받아온 상점의 비밀>

"창문가에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고, 지붕에 비둘기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분홍빛 벽돌집을 보았어요"
어른들은 절대로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합니다. 어른들에게 말할 때는 '10억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야, 굉장히 좋은 집을 보았구나!'라고 감탄합니다.

'어린 왕자'의 한 구절이다. 숫자를 좋아한다는 어른들이 신기했던 나도 이제 숫자가 와 닿는다. 10억짜리 집도 월 천 버는 사람도 흔한 듯한 요즘,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런 해피 엔딩을 맺는 것 같다.

"이렇게 해서, 저는 퇴사 전 월급보다 몇 배 더 벌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유튜브라도 찍을 수 있을 것 같은 세상에서, 어린 왕자의 B612 행성처럼 좀 다른 결론을 가진 이야기를 만났다.

이전 삶은 못 살겠고 지금 삶은 마냥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확실히 그렇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해진 정답대로만 살았다면 이 기쁨을 몰랐을 것이라는 것. 이것이 작아도 사랑받는 이 상점이 가진 진짜 비밀이라고.

숫자가 말해주고 극적인 비포 애프터를 보여줘야 이야기가 팔릴 것 같은데, 작가는 어떻게 '우리 집은 제라늄 화분이 예뻐요' 같은 몽실몽실한 마무리를 했을까? 그것도 좋은 회사를 나와 스마트 스토어를 9년 동안 운영한 스토리에.

https://brunch.co.kr/brunchbook/ore100



코로나에 수업도 행사도 취소되었다. 온라인으로라도 뭔가 하자, 하고 스마트 스토어를 시작했다. 생각만큼 주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것저것 정보를 찾아보니 할 일은 많고 갈 길은 멀었다. 마음이 조급한데 아이 둘을 종일 데리고 있으려니 시간도 에너지도 한계에 부딪혔다. 이미 시작된 마라톤 맨 뒤에서 애 둘을 안고 걷듯이 뛰고 뛰듯이 걷는 것 같았다. 앞서 뛰는 수많은 등이 보였다. 그랬던 나에게 이 책은 산책하듯 가도 괜찮다며 살며시 손을 잡아주었다. 


지금 온라인 상에 무엇인가를 만들어 나만의 브랜드를 구축하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시라고. 못하는 것 말고 잘하는 것을 더 잘하시라고. 남들이 정해놓은 방식만을 따르지 마라고 나만의 방식을 찾으라고.


결국 가장 큰 문제는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가 아니라 그것을 쓸 방향을 잡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벤치마킹과 상위 노출 기법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무게추를 나만 팔 수 있는 것으로 옮겼다. 내 스토어를 골목 끝, 주인장을 닮은 조그만 공방 같은 곳으로 만들자 나는 그 안에서 편안해졌다. 나만의 공간 덕분에 누릴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많았다.


캡슐 커피를 뽑거나 드립 커피를 내리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달달한 맥심 한 봉지에 우유 추가해서 내 맘대로 방구석 라테를 만들어 먹으며 생각한다. 이거 말고 별게 또 있을까? 내가 확실히 느끼는 행복이라는 것.


커피 한잔이면 하루를 넉넉히 행복하게 시작할 수 있다는 건, 늘 다니던 길이 고개를 돌리니 꽃길이었다는 발견만큼 설레었다. 내가 특별하게 여기지 않던 기쁨들이 책 속에 보물상자처럼 담겨 있었다. 듣고 싶은 음악을 듣는 삶, 아이의 곁에 있어주고 남편을 챙겨줄 수 있는 여유, 그러면서도 배우고 싶은 건 내가 번 돈으로 배울 수 있는 자신감.


이 책은 우유 거품처럼 나의 일상을 부드러운 라테로 바꿔놓았다. 일을 시작하기 전, 커피에 아가베 시럽을 두세 방울 넣어볼까, 같은 캐럴도 재즈풍으로 들어볼까 하는 게 즐겁다. 택배를 싸며 나도 선물에 행복해할 얼굴을 떠올려 본다. 제품 촬영할 때면 아이들이 함께 찍어달라 하고 덕분에 예쁜 사진을 건진다. 첫째는 택배 포장을 제법 꼼꼼하게 도와주기도 한다.


작가는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고객과 진심을 다해 소통했다. 일상을 나누기 위해 다 마신 커피도 다시 들고 와서 사진을 남겼다. 정말 좋은 상품만 고르고 골라 택배 하나에도 정성을 들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만의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누가 알아줄까 싶지만 분명 알아주는 사람이 생긴다. 한 명이 어렵지 그 한 명만 생기면 열 명, 백 명, 천 명... 점점 더 많아질 거라고. 그러니 당신을 믿고 지금 그 자리에서 시작하시라고. 거기에 '정성'을 더한다면 당신이 원하는 것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작가는 회사 생활도 마음을 다했기에 못 살겠던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러면서 쌓은 노하우도 한 점 한 점 지금의 그림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기에 의미 있다는 것을. 숫자보다 중요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누군가에겐 보인다는 것을.


덕분에 나의 길을 나의 속도로 가는 게 조급하지 않아 졌다. 꾸준히 오래가고 싶다. 길에 핀 키 작은 풀꽃을 놓치지 않고 그림에 담으려 한다.


나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이제 점 하나 찍는 것 같고, 누군가를 따라 그려야 잘 그릴 것 같다면? 커피 향기 솔솔 새어 나오고 좀 특별한 택배 상자가 쌓여있는 보랏빛 문을 빼꼼히 열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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