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신혼부부의 가사분담
연이에게 가끔 전화가 걸려 온다. 통화가 좀 길어진다 싶어 입만 뻐끔뻐끔 벌려 누구냐고 물어보면 항상 같다. 연이보다 두 살 많은 회사 동기 형. 연이가 아내랑 있어서 통화를 오래 못 할 것 같다고 몇 번을 말해도 통화는 한참을 이어지다 끝이 난다. 대개는 회사 일이 힘들다는 신세한탄이라는데, 한 번은 설거지가 하기 싫다고 어찌나 투정을 부리던지. 아내 분과 함께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은 날이었나 보다(그는 결혼한 지 8개월 정도 되었다). 삼겹살은 먹을 땐 좋은데 설거지 하기는 너무 힘들다며 투덜투덜투덜대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아예 안 하는 사람보다야, 그래도 하긴 하고 투덜대는 사람이 낫긴 하다만 그래도 기왕 하는 거 기분 좋게 하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전화를 받는 사람이었다면 위로할 기분이 영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원래 자기가 할 일이 아닌데 하기 싫은 일을 참고 억지로 했다는 투로 들렸기 때문이다.
퇴사하기 전, 야근을 하고 지쳐서 집에 돌아온 날이 있었다. 그날따라 빨래가 수북하다 못해 빨래 바구니에 넘쳐흐르고, 하필 또 내가 설거지를 할 차례였다. 연이도 회사를 다녀와서 지쳐있을 게 뻔했기 때문에 차마 해 달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일단 씻자 싶어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세탁기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싱크대 앞에 서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연이. 나서서 해 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고맙다는 내 말에 대한 그의 답은 더 감동이었다.
나: 연아, 고마워. 빨래랑 설거지 해 줘서.
연이: 해 준거 아닌데? 그냥 한 건데?
쿵.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아 우리의 대화는 그냥 그렇게 끝났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고, 연이는 설거지를 하며 노래를 부르느라 바빴으니까.
‘해 주다’와 ‘하다’. 연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혼자 침대에 누워 그 둘의 차이를 곱씹어 보았다. ‘해 주다’는 원래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지만 누가 시켜서 하거나 호의를 베풀어 도와준다는 느낌이 있다. ‘하다’는 그냥 원래 내가 해야 할 일이라서 하는 것. 어찌 보면 해야 할 일도 아니고, 그저 자연스럽게 할 수밖에 없는 일. 연이에게는 빨래와 설거지가 밤새 자란 수염을 매일 아침 면도하는 것처럼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요즘은 예전과는 다르게 가사와 육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남편 분들이 많아지는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지만, ‘해 준다’ 또는 ‘도와준다’는 생각은 여전한 듯하다. 연이가 회사에서 가사분담이 화두에 오른 적이 있다며 나에게 해 준 이야기가 있다. 연이네 팀장님이 음식물 쓰레기는 꼭 자기가 나서서 버린다고 자랑하듯 말하며(다른 건 언급하지 않은 걸 보니까 아무래도 안 하는 것 같다), 연이에게도 물어봤다고 한다.
팀장님: 나는 그래도 음식물 쓰레기는 꼭 내가 버리는데 넌 어떠냐. 집안일 많이 도와줘?
연이: 저희는 그냥 전부 같이 해요. 뭐, 도와준다 이런 개념보다는 그냥 다 같이 하는 것 같아요.
팀장님: (웃으며) 재수 없다 너.
연이: ...ㅎㅎ.....
연이는 실제로도 나와 모든 걸 함께 해 준다. 아니, 한다. 어디서 배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빨래, 설거지, 청소, 쓰레기 버리기는 아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함께 사는 ‘우리’의 일이라는 인식이 새겨져 있는 아이 같다. 남편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는 가사분담 문제로 왈가왈부 다투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가사분담에 대한 협의라고는, 설거지는 매일매일 번갈아 가면서 하자! 정도? 나와 연이가 집안일을 하는 비율은 50:50 아니면 40:60 정도 될까. 60이 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부끄럽게도 연이가 60 내가 40이다. 특히나 나는 빨랫감을 진한 색과 밝은 색으로 구분하기도 귀찮아서 한 번에 때려 넣고(?) 세탁기를 돌려버리는 사람인데, 연이는 나의 만행을 몇 번 목격한 이후로 포기했는지 빨래는 그냥 자기가 하겠다고 선언하더라.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귀찮을 만도 한데 하얀 빨래는 하얀 빨래대로, 진한 빨래는 진한 빨래대로 살뜰히도 나누어서 세탁기를 여러 번 돌리는 내 남편. 심지어 옷을 갤 때도 나보다 훨씬 반듯하게 잘 갠다. 어차피 펴서 입을 건데 굳이 왜? 하는 생각으로 대충 턱턱 접어 놓기만 하는 나랑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연이가 빨래도 하고, 요리도 하고, 쓰레기도 곧잘 버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어쩜 저렇게 완벽한 남편을 두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래도 시어머니께서 보시면 마음이 조금 안 좋으실 수도 있겠다 싶다. 워낙 남녀평등 정신이 투철하고(?) 혼자 고생하기 싫어하는 며느리를 보신 덕분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예쁜 아들이 집안일을 너무 열심히 하고 있으니. 사실 우리 시어머니는 아들이 손에 물을 묻힌다고 해서 나에게 뭐라고 하실 분도 아니고, 오히려 남자도 다 해야 하는 일이라며 나를 응원해 주셨을 분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죄송한 마음이 드는 걸 수도 있겠다. 우리 시어머니 같이 며느리 편을 들어주시는 분을 만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감사하고, 연이를 흔치 않은 남자로 길러주셔서 또 한 번 감사하다.
가장 중요한 건 그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아내가 집안일을 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고, 남편이 집안일을 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다.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는 순간 고마움이 사라지고, 그러면 우리는 삐걱거리게 된다. 이 시대의 남편들이, 그리고 아내들이 집안일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당연한 걸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혼 생활 2년 차인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연애를 7년이나 한 후에도 여전히 연애하는 것 같은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 말은 해도 괜찮지 않을까. 우리가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처음과 다를 바 없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빨래와 설거지도 마찬가지다.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면 고마워지고, 고마워지면 도와주게 되고, 결국엔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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