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선생님은 일기 숙제를 내면서 조건을 하나 걸었다. 문장을 쓸 때 '나는'으로 시작하지 말 것. 이 조건을 듣기 전까지 정말 몰랐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문장이 '나'로부터 쓰이는지! 무슨 문장을 쓰려고 하면 자꾸 '나는'을 넣어야만 할 것 같아 손이 근질근질했다. 아무래도 '나는' 없이는 일기 분량이 충분히 나오지가 않았다.
매일 일기 쓰기 숙제를 고역처럼 여기는 나에게 엄마는 내 인생 최초의 글쓰기 선생님이 돼주었다. 도대체가 쓸거리가 없다고, 뭘 써야 하냐고 징징대던 나에게 엄마는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다. 그중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은 바로 주변을 잘 관찰해 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들으면 참 진부한 조언 같지만 엄마는 정말 구체적으로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것까지 유심히 들여다보라고 했다.
매일 무엇을 했고 그래서 기분이 어땠는지에 대한 것만 반복되던 내 일기는 엄마의 조언 이후 주제가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주제는 바로 동생과의 갈등이었는데, 쓰자마자 반 친구들 앞에서 칭찬받고 낭독되는 영광을 누렸다. 제목은 '내 동생과 크레파스'. 내 물건은 뭐든 탐내고 다 따라 하는 내 동생이 기어코 내가 아끼는 크레파스마저 다 부러뜨려 놨으며 그런 동생이 정말 밉다는 내용이었다. 동생이 미운 마음에 빠져 정신없이 썼더니 여덟 살이 쓴 것 치고 꽤나 분량이 길었고 친구들이 박장대소할 정도로 재미도 있었다. '나는'이 있는지 없는지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주어는 온통 '내 동생'이었다.
그때는 별생각 없었지만 일기를 통한 이 경험은 곱씹어볼수록 정말 중요한 가르침이다. 선생님과 엄마의 조언은 결국 같은 맥락이다. '나'를 벗어나서 '주변'을 보라는 것. 아주 하찮은 것까지 유심히 관찰해 보라는 것. 글뿐 아니라 미술, 음악 등 대부분의 창작 활동은 처음에 나로부터 출발하기 마련이다. 그 과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이 에고(ego)의 단계는 벗어나게 돼있고, 그래야만 한다. 특수성에서 보편성을 끌어내야만 성숙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뿐 아니라 한 개인의 성숙도 이와 같지 않을까.
성공한 철학자 중 흔치 않게 아주 안정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다 간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 자신이 행복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말한다. 그중 하나가 '내가 아니라 바깥세상에 관심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말고의 논의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불교에서 말하듯 마음(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그저 외부 세상을 비추는 거울 같은 것이라는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는 말에 가깝다. '무아', 즉 나라는 것은 따로 없다는 것이다. 나와 외부세계의 경계가 사실은 없고 다 하나라는 것, 다 이어져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린지, 이것이 행복과 대체 무슨 상관인지 잘 이해가 안 간다면, 이제 막 말을 시작한 아기를 떠올려 보자. 아기들은 자신을 칭할 때 '나'가 아니라 남들이 자기를 부르는 대로, 자기 이름으로 자신을 칭한다. 아기들에게는 '나'라는 인식, 즉 나와 외부 세계 간의 구분이 없다. 아기가 보는 세상은 나라는 의식의 필터를 쓰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인 것이다. 태어났을 때에는 너무도 당연한 '있는 그대로 보기', 즉 무아의 상태를 우리는 점점 잃고 자꾸만 나를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나'라는 틀에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은 희로애락을 일으킨다. 이 일은 나에게 좋은 일이고 저 일은 나에게 나쁜 일이다. 하지만 나를 지우면 세상은 '그저 그러할' 뿐이다. 그 평온함을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나보다 바깥을 보라는 러셀의 말과 마음 수양을 강조하는 불교의 입장은 얼핏 반대로 읽힐 수 있으나 사실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어떤 이름 모를 무시무시한 마약의 효과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 약을 먹으면 몇 분 정도 자기가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그게 도무지 무슨 상태이며 그게 왜 무섭다는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몇 번을 되묻자 화자가 기가 막히게 묘사를 했는데, 펑!!!!! 하고 '나'라는 존재, 인식, 의식, 개념이 단번에 아예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로 이해가 되고 그 상태를 떠올릴 수 있었는데 상상만으로도 정말 어마무시한 느낌이었다. 내가 알던 세계가 완전히 다르게 새로이 보인다는 소리 아닌가.
그 무시무시한 상태는 사실 다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상태를 단지 상상만 해봤을 뿐인데도 제대로 된 명상이 어떤 느낌인지 새삼 이해할 수 있었다. 문장에서 '나는'을 지우는 훈련처럼 몸에서 나라는 의식을 덜 감각해 보는 일일 것이다. 글쓰기든 명상이든 나로부터 벗어나기, 그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연습해 볼 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