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watched ⎮ February 19, 2024
1. 고어 장르를 잘 보지 못하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을 항상 (좋은 의미로) 인상 깊게 봤었기 때문에 이번에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하고 있는 아카데미 기획전 티켓을 바로 예매해서 보러 갔다. 일단 내가 본 란티모스 작품들 중에서는 3위에 안착. 킬링 디어, 송곳니 그 다음이다.
2. 원작 책을 가져와 각색한 것이라는 걸 모르는 상태에서 봤는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소재를 기막히고 창의롭게 차용했다는 것이었다. 여자 프랑켄슈타인을 메인 캐릭터로 삼은 것도 흥미로웠으나 더 흥미로운 점은 “여성”이기에 임신이 가능하고 그렇게 자살한 여자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꺼내 그 아이의 뇌를 여자에게 이식할 생각을 했다니. 벨라 벡스터는 어머니이자 딸인 피조물, 프랑켄슈타인이다. 성인의 몸에 아이의 자아가 들어있기 때문에 영화 러닝타임이 흐를수록 벨라는 빠르게 성장한다. 새로운 단어를 익히고, 구강기에서 항문기, 남근기를 거치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세상의 쓴맛을 맛보기도 하고, 호기심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며 성장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남근기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고 하면 조금 신랄한 표현일까? 섹스, 섹스, 그리고 섹스 장면의 나열이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했기에.)
3. 혹자는 이를 바비Barbie(2023)보다 나은 페미니즘 영화라고 칭하던데 (하단 캡쳐본 참고) 아무리 욕망하는 남성을 고도로 돌려깐다고 하더라도 철저히 남성 감독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주체적 섹시', '자발적 매춘'을 포함하고 있는 영화가 어떻게 페미니즘 영화의 교본이 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이 영화가 18세기 프랑스 매음굴에서 상영되었다면 분명 페미니즘 영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21세기인데..?
4. 그렇다고 여성혐오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분명 벨라 벡스터라는 여성은 자라난다. 성인의 몸에 갇혀있던 아기의 자아는 날이 갈수록 성장하고, 매일 세상을 배우고 새로운 것을 깨닫는다. 그 중 일부는 섹스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전반에 깔린 male-gaze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몸을 판다고 해서 그것이 수치라고 느끼지 않는 벨라에게는 프랑스 파리에서의 매춘 경험 역시 성장을 위한 발판일 뿐이다. 오히려 이는 자신의 소유물인 '아내' 혹은 '애인'이 다른 남자와 섹스를 했다거나, 돈을 받고 섹스를 했다는 이유로 그 여성이 더러워졌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남성'들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벨라는 당당하고 주체적이며 자기결정권을 갖고 있으며, 남성들의 실험 그리고 욕망의 대상에 불과했던 이 여성은 마침내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그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간다. 섹스는 벨라가 배우는 세상의 일부일 뿐인데, 영화 러닝타임의 1/3을 차지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뿐.
5. 지금까지 보아온 영화 엔딩 크레딧 중 가장 예술적이었고, 감독의 미감이 극렬히 드러났다고 생각했다. 괴이하고 공포스럽기까지 한 갓윈 벡스터의 소화를 돕는 장치부터 시작하여 그의 저택과 이후 등장하는 모든 장소들의 세트는 정말 치밀하게 아름다웠다. 벨라 벡스터의 의상 역시 퓨처리즘적이면서도 볼륨감이 강조되어 잔뜩 부풀어 있는 모습이 기묘하게 어울렸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거나 케이블카를 탈 때 펼쳐지는 장면들은 몽환적이고 판타지스러웠다. 고딕적이면서도 퓨처리즘적이고, 스팀펑크 그 자체인 장면들을 볼 때마다 화려한 아름다움에 눈을 뗄 수 없었다.
6. 저스틴 펜드릭스의 음악 역시 이보다 더 '가여운 것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나오던 피날레와 엔딩 크레딧 노래를 잊을 수가 없어, 영화를 다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반복재생으로 들었다. 닥치는 대로 돌아다니고,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섹스를 하던 벨라는 마침내 성장을 마치고 온전히 존재하게 된다. 촘촘하게 여러 겹으로 레이어를 쌓아올린 음악이 가끔씩 충돌하고, 폭발하고, 벅차오르며 벨라를 노래하는 것만 같다. https://youtu.be/QDeGyYvyNqs?si=tQvXoe0BolWzW8jS
7. 제목의 '가여운 것들Poor Things'은 누구일까. 일단 벨라는 poor thing이 아니다. 가여운 것들은 벨라가 아니라, 벨라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다. 그가 세상에 존재한 이래로 그를 억압해온 남성들은 계속해서 존재했다. 가장 처음은 갓윈 벡스터, 자신을 만들어준 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는 자신의 실험체인 벨라가 위험해질 수 있기에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억압한다. 그러다 등장한 던컨 웨더번과 여행을 떠난 벨라는 점차 자신을 구속해오고 자신이 타인과 교류하는 것을 싫어하는 그에게 짜증을 느낀다. 여객선에서 만난 해리는 희망에 가득 차 보고 읽고 듣는 족족 모든 것을 학습하고 흡수하는 벨라에게 세상의 뒷편에 존재하는 절망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 남성은 벨라 이전의 빅토리아, 그러니까 벨라에게 자신의 신체를 남겨주고 떠난 어머니인 빅토리아를 찾으러 온 전남편 알피이다. 알프레드 블레싱턴은 자신의 아내를 되찾고, 다시금 소유하려고 한다. 그러나 벨라는 파리에서 매춘부로 지내다가 돌아온 그가 더럽혀졌다고 생각하고 수술시키려고 하는 전남편에게 복수하고, 벗어난다. 타인-여성-을 대상화하고 욕망하는 가여운 남자들을 떠나 한 주체적인 여성으로서의 위치에 도달한 벨라는 세상을 가엾게 여긴다. 자신을 실험체로 보던 남자, 군말없이 섹스해주기를 바라는 남자, 자신의 소유물인 아내로 돌아오라고 요구하는 남자들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난 벨라의 세계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불쾌하지만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내러 온다.
라는 말이 다시금 떠오른다.